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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과 찰스 왕세자 부부 그리고 존슨 총리, 스티머 야당(노동당) 당수, 딕 런던경찰청장 그리고 웰비 성공회 켄터베리대주교, 국방 관계자 등 지도층 인사가 지난 주 런던 한복판에 함께 모여 국가 행사를 진행했다.
올해는 무명용사의 묘지를 만든 지 100주년이라 더 각별했다.
현충일 Remembrance Day과 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 Armistice Day 두 개 행사를 치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같은 성격이다.
무엇보다 예년과 달리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초청인사만 참석해 방역수칙과 거리두기를 지키며 진행했다. BBC가 실시간 중계방송과 뉴스로 영국은 물론 전세계에 내보냈다.
1차 대전은 1914년 시작해 4년 후인 1918년 11월 11일 오전11시에 마쳤다. 이 일시를 종전 혹은 휴전 뜻의 Armistice Day 종전기념일이라 부른다.
순국전몰장병을 기리기 위해 행사를 11월 둘째 일요일에 가지면서 Remembrance Day 현충일로 부른다.
1차 대전이 유럽서 발생했으나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총 2,800만 명 (=군인 9백만 + 민간인 1,900만 명)이나 사망자 발생해 ‘엄청난 전쟁The Great War’라 부르기도 한다.
영국은 연합군으로 참전해 승전국이 되었으나 90만 명 이상 장병이 이 전쟁서 사망.
무명용사 묘 Grave/Tomb of the Unknown Warrior
무명용사 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실내에 위치한다. 이 사원은 영국 대표 교회이며 또한 왕실 포함 국가 주요인사 묘지다. 정문은 유럽 주요 교회/성당과 마찬가지로 서쪽이다.(현재는 관람객 출구로 사용)
정문 가장 가까운, 즉 복도 서쪽 끝 중앙에 검은 직사각형 대리석 그리고 그 테두리를 일년내내 빨간 양귀비꽃이 에워싸고 있다. 바로 이 곳이다. 방문하려면 사원에 입장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을 포함 영국을 방문하는 외국 정상은 이 묘지를 방문해 예를 표한 후 일정을 이어간다)
영국이 1920년 가장 먼저 만든 이후 전세계 여러 나라가 국가차원서 조성했다.
묘지 위 검정색 대리석은 1차 대전 피해가 가장 컸으며 연합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며 여러 전투지가 되었던 벨기에가 선물한 것이다.
무명용사 관을 지하에 내린 후엔 영국군 피해가 컸던 서부전선 격전지 여러 곳에서 모은 흙 100부대로 덮고 채웠다.
묘지에 적힌 성경 한 구절, Great Love hath no man than this.
자기 목숨을 버린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으리 (요한복음 15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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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영국을 국빈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방문하여 무명용사묘에 헌화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
누가, 어떻게 제안했나1차 대전중인 1916년 프랑스 땅에서 만들어진 서부전선 Western Front서 시무중이던 데이빗 레일톤 목사가 제안했다. 육군 군목인 그가 전선을 오가는 중에 엉성하게 만든 십자가에 ‘이름없는 영국 병사의 무덤’이라고 적힌 것을 본 것!
종전 이후 1920년 레일톤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주임신부에게 “조국을 위해 여러 전장서 흔적도 없이 산화한 무명전사 군인을 대관식이 거행되고 또한 여러 왕이 묻힌 <국가 대표> 교회에 모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편지를 쓴다. 이 제안은 총리(데이빗 로이드 조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국왕 조지 5세의 허락을 받는다.
군인 선정, 영국 도착과 묘지 조성
1차 대전서 영국군 전사자가 엄청났던 프랑스 4곳 격전지서 각각 추스린 유해를 담은 총 4개 관을 아라스 인근 교회에 가져온다. 1920년 11월 7일 저녁 영국 책임 군목(중령)이 엎드려 기도하며 국기에 감싸 놓았던 4개 중 하나를 무작위로 선별한다. 이후 군함으로 도버해협을 건너며 특별 기차로 런던 빅토리아역에 도착. 11월 11일 아침, 무명용사 관은 6마리 말이 끄는 무기 수레에 얹혀 수많은 인파의 침묵속 배웅과 인사를 받으며 Hyde Park Corner, The Mall 을 거쳐 Whitehall 중앙에 있는 충혼탑 the Cenotaph 서 멈춰 예를 갖춘다.
장지인 사원으로 향하는 운구행렬 바로 뒤를 국왕 조지 5세, 왕실 가족과 국무위원 그리고 육 해 공군 최고 지휘관이 뒤따른다.
무명용사는 육 해 공군 그 어디 소속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어쩌면 영국인이 아닌 영연방 혹은 식민지국 출신일 수도. 단지 아무 표식이나 비석없이 국가의 부름 이후 땅에 묻힌 사람의 ‘대표’ 혹은 ‘대명사’이다. 따라서 전쟁에 나가 생을 달리한 할아버지, 아버지 혹은 작은 아버지, 외삼촌, 고모부나 이모부, 사촌 형이나 동생, 오빠나 남동생으로 ‘믿고’ 각자 가슴에 묻고 새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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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 묘지에 적힌 성경 한 구절 Great Love hath no man than this 자기 목숨을 버린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으리 (요한복음 15장 13절) |
로열 웨딩부케와 화환여왕 모친the Queen Mother 은 나중에 국왕 조지 6세가 되는 당시 요크공과 이 사원에서 1923년 결혼식을 올렸다. 식을 마친 신부는 식장을 떠나기 전 웨딩부케를 이 무명용사의 묘에 정중히 올려 놓는다. 1차 대전에 나가 전사한 친오빠에게 존경과 함께 그리움을 표시한 것.
이 ‘사건’ 이후 왕실 결혼 신부는 웨딩부케를 이 무덤에 바치는 것이 영국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여왕모친은 인기가 아주 높았으며 장수 후 2002년 서거했다. 이 사원서 장례식을 가진 다음 날 여왕이 화환을 들고 다시 방문한다. “내 장례식 조화를 무명용사 묘에 바쳐 달라”는 엄마의 유언을 직접 지켜 드리기 위해서.
영•
미 최고 훈장 추서영국은 이 무명용사에게 최고영예인 빅토리아 크로스 훈장을 내렸다. 우방인 미국은 군인에게 주는 최상 등급인 의회 명예 메달Congressional Medal of Honor 를 추서했다. 미국의회 명예협회는 공식 리본을 추가로 서훈했다. 이 기념물은 무덤 인접 기둥에 별도 전시중.
▣ 선정 이유
▶1차 세계대전 (1914-1918)은 유럽국가간 엄청난 피해를 가져 온 전쟁이다.
종전Armistice 100 주년이 지났어도 많은 상처와 자국이 유럽 곳곳에 있다.
한국은 일제 강점기(1910- 1945) 였다.
▶EU 유럽연합 탄생의 배경에는 ‘같은 지역에 이웃하며 사는 나라끼리 1차 대전같은 처참하고 비인륜적인 전쟁만은 하지 말자’ 는 정신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 한다.
▶영국인은 ‘역사적 사건’ 에 의미와 함께 스토리를 멋지게 엮어내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왕실은 국민이 원하는 ‘의미 있는 실천’에 앞장 서는 점에서 존경이 이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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