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서울의 한 병원 1인실.
저의 사랑하는 누나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제 아내가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지켜줄 수 없었던 누나의 마지막 몇 주간 돌봐드리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누나의 마지막 호흡이 남아있던 때에 한국에 도착한 저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손에 올려드렸습니다. 누나는 다음날 아침,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고 지금, 벌써 1년의 시간이 지나 1주기 추도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너무도 아파하시는 부모님을 위로하며 남은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옛말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천붕(天崩), 자식이 먼저 가면 참척(慘慽)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여의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고 자식을 잃는 것은 땅이 꺼지는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어버이가 숨을 거두면 해와 달이 빛을 잃은 것 같고 자식이 숨지면 온 세상이 흙빛으로 캄캄하게 변하는 것 같답니다.
자식은 부모 상(喪)을 당하면 세월을 한탄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게 되면 하늘을 향해 원망 아닌 원망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답니다.
허난설헌의 <哭子(곡자)>에 보면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그리고 마지막 句에서는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라며 극한적 슬픔 토로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려면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한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가 건너야 할 마지막 강, 레테의 강물을 마시면 이승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망각의 강’ 이지요.
무언가 그럴듯한 말이지만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죽은자는 레테의 강을 마시고 산자를 잊을 수 있지만 산자는 어디서 레테의 강을 만날 수 있을까?’
죽은자는 산자를 잊을 수 있겠지만 산자는 죽은 자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먼저 간 사람을 놓아주라고, 잊으라하지만 이 그리움이란 아픔이 그렇게 쉽게 잊혀질 수 있는 것입니까.
추도예배를 드리기 전날 밤, 어머니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아픈 지난 1년이었다’고.
그리고 저희들이 걱정할까봐 마음속으로 많이 삭이고 표시 내지 않으려 많이 노력하셨다고.
지난 1년 동안 슬픔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남은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참고 또 참으며 지내오시다가 추도예배 하루 전 자신의 아프고 애닮픈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제 마음이 무척이나 아려왔습니다.
자고로,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말이겠지요 결국, 보내지 못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태어나기 전 보이지 않는 아기를 열 달을 품은 것처럼 먼저 보낸 자식을 그 품속에 다시 품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앞에 자식의 죽음이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마음에 담고 있으니까요. 그저 다만, 지금 곁에 없을뿐….
누나는 사랑받으며 태어나 살다가사랑받으며 떠났습니다. 참 행복한 가정에서 온갖 귀여움 받으며 성장했고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 어머니에게 원 없이 효도하며 살았습니다. 서울시에서 효녀상도 받았습니다.
몸에 이상을 느낀 후에는 한국에서는 최고라고 알려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아낌없이 받았습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습니다.
누나의 사랑 받음은 살아 생전의 삶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애도의 물결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에는 더 많이 올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함께 아파하고 슬픔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더군다나 영국에서 귀국했던 많은 성도님들과 한국을 방문중이던 성도님들까지도 서울뿐만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모두 올라오셔서 함께 아파하고 비탄에 빠져 있는 어머님과 아버님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사랑을 받으며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을까요. 비록 짧은 삶을 삶았지만 누나의 떠남은 결코 비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떠났습니다. 이것이 남겨진 우리의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실 누나는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누리지는 못했었습니다. 세상 누구 부럽지 않게 성공적인 삶을 살던 누나는 갑작스럽게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영국에 있는 제게 어머님은 흐느껴 우시면서 전화로 “누나가 다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느끼는 바가 있어 어머님께 “이번에 누나는 괜찮을테니 울지마시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리고 긴 수술을 앞두고 병실에서 저의 스승이 되시는 목사님께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그 후 십수년, 누나는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1년 전, 누나를 향한 하늘문이 열렸습니다.
1주기 추도 예배를 드리면서 더욱 사랑하고 추억하되 말씀과 믿음 안에서 슬픔을 이기고 천국의 소망을 가져야하는 것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사망(死亡)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망신고를 합니다. ‘죽고 망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사망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자는 자’라고 부릅니다. 인생이라는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내고 깊은 단잠에 들었다는것이지요. 이 잠은 다음날의 아침에 활기차게 일어날 소망을 담고 있는 잠이란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잠자는 자들은 다시 일어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 4:13-15)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루에 15만명씩 매년 5500만 명이 사망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가지 않고 그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살아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어떻게 죽느냐 누구 앞에서의 죽음인가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누나의 마지막 일주일은 영적인 전쟁이 심했습니다. 삶의 마지막 호흡을 남겨놓고 벌어지던 싸움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했지만 하나님은 누나를 승리케 하셨습니다. 마귀는 누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했지만 마지막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은 이 성경구절을 누나의 묘비에 새겨넣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요한복음 10:28)
추도예배를 드리면서 부모님께 천국의 소망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천국에는 해로움과 위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마귀도 없고, 강도도 없습니다.”(계7:16)
고통과 통증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혹시 우리가 모를 누나의 눈물이 있었다면 인간인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고 안다 해도 닦아줄 수 없었던 마음속 눈물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섬세하신 손길이 작은 눈물 방울 하나 하나까지 닦아 주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진정한 집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단지 이 세상을 여행하는 것입니다. My home is in heaven. I am just traveling through this world. - Billy Graham
그리고 사실 우리도 무디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천국으로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We are nearer heaven tonight than we have ever been before in our lives. - D.L. Moody.
우리가 부르는 찬송처럼“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영원한 결별이 아닌 잠시의 이별인 이 시간 속에 우리는 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누나는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열심, 끈기, 헌신, 베품의 삶을 살았고 기쁨, 성취, 사랑받음과 사랑함으로 가득찼던 누나의 삶은 아름다운 여정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Ending’이 아니라 그 다음의 생명인 영생으로 이어진 ‘Anding’입니다.
추도예배를 드리고 나서 부모님은 무척이나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함께한 1주일 동안, 저는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더욱더 위로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부모님께 자주 오겠다고 말씀드리자 “여기는 신경쓰지 말어, 주어진 사명의 길을 가야지…”라고 하십니다.
배웅 나온 동생과 어머니가 이제 공항버스에 올라탄 저를 보고 있습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합니다. 어머니의 표정이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려 했는데 잘 되지가 않았습니다. 그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버스는 출발했고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자상한 동생이 가까이에 살고 있어 부모님을 잘 돌봐드리겠지만 영국으로 돌아오는 이 시간, 제 마음이 너무도… 너무도… 너무도… 아픔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제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자꾸 훌쩍이다보니 옆 좌석에 앉은 분에게 눈치가 보입니다. 여기서 글을 마무리해야 겠습니다.
조성영 목사
글로리아 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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