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깨고 나온 새
언젠가 알의 껍질을 깨고 막 세상으로 나오는 병아리를 본 적이 있다.
털이 채 나지 않은 몸뚱아리를 가진 이 작은 새(?)는 끈끈한 점막에 휩싸인 채 아직 눈을 뜨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뜨리며 힘들게 징그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병아리를 보면서 생명의 경이에 감탄하기에 앞서 솔직히 측은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고야~ 재는 무엇 때문에 저토록 기를 쓰며 나오는 것일까? 안전한 알 속에 있으면 더 편하고 좋을 것 같은데… 너도 이제 고생문이 훤하게 열렸구나!”
깨진 껍질을 주시하던 나는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그의 책 <데미안>에서 한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몸부림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또 다른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알이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비로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되고 그 세계 안에서 날 수 있게 된다는 <데미안>에서 ‘막스 데미안’(Max Demian)’이 남긴 말이다. 남들이 볼 때는 ‘껍질 깨기’가 하나의 구경거리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껍질안에 갇힌 새에게는 ‘갇히느냐 열리느냐’의 문제이고 동시에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문제라는 것이 핵심이다.
깨어진 옥합과 향유
깨어진 알 껍질을 보면서 나는 예수님 앞에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나온 여인을 생각하였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무렵에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마태복음 26:6-13; 마가복음 14:3-9).
그런데 옥합에 담겨 있는 이 향유는 너무나 비싼 것이라 노동자의 1년 수입과 버금갔다.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왜 이 아까운 것을 허비하느냐”고 분개하며 “차라리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이외의 반응을 보이셨다. ‘이 여인은 힘을 다하여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힘들여 옥합을 깬 여인의 행위를 칭찬하셨다.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자신의 몸을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속의 제물(Atonement sacrifice)로 바치기 위한 것이었기에, 예수님은 이 여인이 옥합을 깨어 그 안에 있는 향유를 꺼내어 자신의 머리에 붓는 행위가 얼마나 과감하고, 용기 있고, 힘이 들고, 가치가 있는 믿음의 행동이었는지를 칭찬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도 중요하고 또 그들은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장례를 준비하는 일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Once for all)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에 동참하는 행위가 되기에 두고두고 온 세상에 전해질 위대한 믿음의 행동이었음을 친히 밝히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여인이 힘들여 옥합을 깨지 않았다면 어떠한 상황이 벌어졌을까?
만약 옥합이 인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면 그래서 자신의 깨뜨려짐을 거부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향유는 결코 부어질 수 없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장례는 향기로 옷이 입혀지지 못했을 것이며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었을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껍질 깨기
아무나 껍질을 깨는 것은 아니다. 용기없는 자는 껍질 속에 그냥 안주해 버리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향해 자신을 던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나름대로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을 부인하고 포기하는 방법을 몸으로 배운 사람들이 아니면 결코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게 된다. 혹자에게는 껍질 깨는 것 자체가 낭만적이고 기분 좋은 일로 생각되겠지만 껍질 깨는 것은 결코 낭만적이지도 않고 기분 좋은 일도 아니다. 이 일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새로운 세상을 체험할 수 있다는 믿음에 자신의 전 인격과 생명을 던지는 행위가 된다.
껍질 안의 세계와 껍질 밖의 세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그것은 껍질의 보호 속에 알로 남아 썩어 죽느냐, 새가 되어 날아갈 수 있느냐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드리워진 껍질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각자의 결단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의 껍질을 깨는 자만이 진정한 자아의 승리와 신앙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아무리 아플지라도…
껍질을 깨는 데는 여태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 지주들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아픔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아픔은 인생의 지반을 뒤흔든다는 점에서, 자신의 인생전체를 포기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점에서 ‘아름다운 아픔’ 일 수 있다. 즉 이 아픔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프지만 가장 아름다운 아픔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변화를 결코 두려워 말고 껍질을 깨는데 온 힘을 다 쏟아야 할 것이다.
박금일 목사
원네이션 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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