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을 샅샅이 뒤졌어도 인주를 찾을 수가 없다. 급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어 여유를 갖고 찾았는데 며칠 동안 이곳저곳 집안에 있을만한 곳을 다 뒤져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도장을 가지고 있어도 도장밥인 인주가 없으니 도장조차 쓸모가 없다. 인주를 찾아 헤매는 동안 뜻하지 않게 도장-도장밥의 관계를 통하여 인생의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인주를 가지고 있을만한 친지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지만 가지고 있는 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긴 영국 땅에서 모든 서류는 사인을 통해서 작성하고 통용하기 때문에 도장을 사용할 일이란 지극히 드물다. 나 또한 일 년에 딱 한번 상회에 보고하기 위하여 교회 사무총회록을 작성할 때 한번 씩 사용해 왔다. 누군가 시대의 변화에 가장 둔감한 단체가 교회라고 했던가? 폐쇄적인 군대의 병영문화가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 신기한 반면, 교회가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둔감하다는 비판을 이러한 점에서도 피하기 어려운 것 같다.
흥미로운 일은, 사정이 딱하다고 생각했는지 인주를 가지고 있냐고 묻는 내 전화를 받는 이마다 인주가 없다고만 답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공해 준다. 빨간 사인펜을 칠해 보세요. 입술에 바르는 루즈를 사용해 보세요. 하지만 사인펜은 가지고 있지 않기에 아내의 빨간 루즈를 빌려서 칠하고 눌러보았다. 근데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검은 구두약이라도 사용해 보세요. 기가 막힌 아이디어인 것 같아 이것도 실험해 보았다. 그런데 구두약은 물기만 묻어나지 인주처럼 그렇게 검은 색이 좀처럼 찍히지 않는다. 나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주란 물건이 매우 독특한 성분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제품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호기심이 발동한다.
내 곁에 가까이 있었지만 내가 인주를 너무나 잘 몰랐다는 생각과 궁금증이 겹치면서 검색을 해 보았다. 아무래도 구글보다 동양 문화에 밝을 것 같은 네이버에 들어가 검색을 해 보았다. 그런데 관련된 내용이 매우 적다. 제대로 관련된 내용은 단 하나 밖에 없는 것 같다. 인주에 관해 조사해서 발표하고 있는 한 블로거의 글을 발견했다. 인주의 재료는 제조사마다 만드는 방법과 재료와 비율이 다 다르며, 인주의 재료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제조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블로거는 전통적인 재료와 제조법을 알아내어 밝혀주고 있다. 이 블로거가 올린 내용을 요약해 본다.
인주(印朱)의 주재료는 붉은 모래라고 불리는 주사이며 주사의 주성분은 황화수은이다 주사에 알칼리 반응을 일으켜 수은을 제거한 은주(銀朱)에 피마자 기름, 목람(木藍), 송진을 넣고 쑥 잎이나 한지를 넣어 반죽한 후 굳힌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지 않고 종이 펄프 같은 것에 빨간색 안료를 섞거나 스펀지에 염료를 적시는 방식으로 제조하기도 한다.
인주 사건(?)으로 인해 주변을 둘러볼 관심이 생겼다.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당연히 여기다가 필요나 관계가 뜸하게 대면 그나마 관심조차 끊어버리고 무심하게 대한 대상은 없었는지? 그것이 사물이든 인격체든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또 도장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인주 따위는 무시하는 태도는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도장밥이 없으면 도장도 무용화되고 마는 소중한 진리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밥이면 다 통한다는데 인주에 도장밥이란 호칭을 부친 것을 보면 조상님들은 이런 진리를 이미 깨우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나에게 인주-도장밥과 같은 존재는 무엇이고 누구일까? 자기를 묻히고 흩어뜨려서 상대방의 모양과 흔적을 뚜렷이 남기도록 돕는 역할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붉은 인주를 보면서 십자가의 정신까지 묵상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내 곁에 머물러 나를 인주 묻힌 도장처럼 쓸모 있게 만들어 주는 도장밥과 같은 이들에게 안부를 묻는 카톡이라도 보내야 할 것 같다. 남의 것을 카피해서 보내는, 절기에 따른 의례적인 인사가 아닌 마음을 담은 진정한 인사를 보내야겠다. 메마르고 부족한 나를 인주 묻은 도장처럼 여기시고 쓸모 있게 써 주시는 그 분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린다.
김석천 목사
행복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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