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패션의 선구자
비비안은미니스커트의 창시자 마리콴트 이후 영국디자이너로서 두 번째로 파리에서 패션쇼를 개최한 진보적인 인물이다. 70년 후반 이후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간 펑크 패션은 그녀의 명성을 상승시켰고 계속해서 파리패션쇼에 참가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패션에 대한 기여도가 크게 인정되어 1990년, 1991년 두 차례나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상을 수여하였다. 또한 1992년에는 영국 여왕의 훈장을 받기도 하였는데, 당시 시상을 위해 버킹햄궁에 나타난 그녀는 속옷을 입지 않은 채 속이 비치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매치한 의상으로 세계적으로 화제의 이미지를 제공하였으며 사람들은그녀의 쇼킹한 패션 철학의 한 면을 읽을 수 있었다.
비비안은 1941년 맨체스터 근처 더비셔에서 태어나 16살 때 런던으로 이동하였다. 그녀의 예술적 잠재력은 하로우 아트 스쿨에 입학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초등학교 미술 선생님의 경력을 갖고 있는 그녀는 5살 연하의, 두번째 남편 Malcolm McLaren 을 만나면서부터 패션영역에 입문하였다.
1971년 이 두사람은 펑크패션의 발상지, 킹스로드에 “Let it Rock” 이라는 간판을 건 트랜디 패션샵을 오픈하여 1950년대의 복고풍 의상과 로큰롤 레코드를 팔았다. 이 때 펑크그룹 ‘Sex Pistols’의 의상을 디자인하므로써 그들의 샵은 유명인을 포함한 패션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그 명성은 점차 영국 전역으로 퍼졌다.
펑크라 하면 고슴도치같이 세운 머리에 가죽의상을 매치한 반항적인 행동이 연상되는데, 이는 당시 젊은이들의 반사회적인 행동을 표현한 수단으로 젊은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한 청년문화 발전의 큰 의미로 여겨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비안의 샵은 당시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끄는 선도자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뉴욕 방문시 새빨간 립스틱과 하이힐의 섹시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섹스문화의 혁명을 예감한 그들은 “Sex” 라 불리는 또 다른 샵을 오픈하여 가죽소재의 섹시 펑크의상 소개로 그녀의 펑크 패션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2006년 봄 여름 쇼 항상 테마적인 쇼를 보여주는 비비안의 패션쇼는, 지난 가을 파리 루브루에서 열린 쇼에서도 사회적 메시지를 내포했다. ‘안티 테러’를 주제로 모델들에게 그린과 블루 립스틱을 메이크업 하여 펑크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를 표현하였고 의상 역시 단정하고 화려하기 보다는 그녀만의 색깔있는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현재 전세계 30개 나라에 걸쳐 550개의 샵을 소유한 그녀는 총거래액이 연 2천만 파운드나 되는 성공적인 인물이다. 또한 2004년, 63번째 생일을 맞이한 그녀는 34년간의 패션철학과 인생관을 재현한 그녀의 작품을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 전시하여 그녀의 패션관을 일반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이는 비비안이 패션뿐만 아니라 아트와 뮤직에도 영향을 끼친 70년대의 가장 유력한 예술인으로 인정되는 전시로 패션계에서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그녀의 패션은 항상 한발 앞선, 어찌 보면 평범한 이에겐 그녀의 패션이 어렵기도 하지만, 아름답고 화려하기 보다는 창조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어, 예술가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이러한 그녀의 패션철학은 패션계의 발전의 공로로 인정되어, 2006 새해를 맞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남작 (Dame)’이라는 훈장을 수여 받아 앞으로 ‘남작 비비안 웨스트우드(Dame Vivienne Westwood)’라 불리게 된다. 이는 매년 여왕이 여러 분야의 공로자에게 수여하는 훈장(O. B. E.-Order of the British Empire)으로 비비안이 공식적인 패션계의 선구자로 인정된 것이다.
차은정
영국 Surrey Art Uni,
Fashion Promotion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