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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내에 중대한 ‘병’이나 ‘장애’가 있을 때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BBC 드라마 The A Wo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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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칼럼에 왠 드라마 이야기인가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요즘에 재미나게 보고 있는 BBC 드라마 중에 흥미있는 내용이 있어서 잠깐 소개할까 한다. The A Word 라는 드라마인데 아이 플레이어로도 볼 수 있다. 처음엔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동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고 심드렁하게 보다가 단순한 발달장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반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고 흥미가 일었다. 자폐증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과거에도 제법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어떤 점에서 필자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필자의 나이도 관계가 있을 수 있겠고 아니면 직업도 많이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추측된다.
아직 몇 회 밖에 방영되지 않았지만 초반을 흔드는 강력한 메시지는 가족내에 중대한 ‘병’이나 ‘장애’가 있을 때 보호자 역할을 하는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식이 자폐증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친척 의사에 말에 발끈하는 엄마가 아들에게서 점점 나타나는 의사 소통 문제의 증후들을 무시하기 위해서 얼마나 처절한 노력을 하느냐 하는 것은 늘 그들과 같이 진료를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도 새롭게 다가왔고 때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느꼈다.
사실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가까운 이웃이나 아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이 사회기술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이느냐는 질문은 가끔씩 받아 보는데 이런 질문이 사실 가장 괴롭다. 왜냐하면 함부로 이야기할 성격이 아닌데다가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나중에는 ‘이렇게 얘기 하더라’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진료를 하고 나면 반드시 부모와 GP에게 편지 형식으로 진료 경과나 결과를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런 오해의 소지를 미리 없애 버린다.
‘이것만 바뀌면 모든 것이 좋아 질텐데’라는 생각이
그 나마 바꿀 수 있는 것도 바뀌지 않게 한다.
모든 해결의 출발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모든 변화는 ‘나’에게서 출발된다.
일전에 트라우마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도 나왔지만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너무나 힘든 현실이 있는 경우에는 ‘부정(denial)’을 한다. 우리가 흔히 보듯이 유명한 사람들 그리고 성숙한 사람들도 궁지에 몰렸을 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 그렇듯이 자신에게 너무나 뼈아프게 느껴지는 사실들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되게 받아들여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어쩌면 이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보이는 상태가 정신병이 생겨서 망상을 가지는 경우가 되겠다. 예를 들면 아들이 탄 비행기기 행방불명이 되어서 흔적도 찾지 못하는 경우는 그 엄마는 정부에게 모처에 아들을 숨겨 놓고 거짓말을 하고 있고 이 모든 것이 미국 CIA하고 짜고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말을 계속하게 되면 자신이나 주변사람들이게 피해가 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엄마가 아들의 자폐증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아들이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는 현상이 생기고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엄마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또래 애들을 초대해 보지만 결과적으로는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가족 내에서 얼마나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냐는 것은 각각의 성장 배경, 성격, 역할 등에 따라 다르다.
The A word 에서는 아빠가 엄마 보다는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이는 아빠들이 엄마들보다 자식에 대한 관계가 느슨해서 아니면 아무래도 직접적인 양육은 엄마가 많이 맡고 있어서 등의 여러 다른 요인이 작용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다. 보통 엄마들은 이 세상에서 내 자식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남편보다는 시어머니 보다도, 물론 잠깐 애를 진찰한 의사는 말할 나위도 없다.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부정(denial)’의 단계를 넘어서 다음 단계로는 최고의 전문가를 붙여서 빨리 치료하자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내 아들의 자폐만 치료되면 인생에 더 이상 문제가 있을 게 없다는 식의 시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자신의 다른 자식들과 가지고 있는 관계나 남편과의 관계 등은 몹시 소홀히 하게 되기 쉽고 그들과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마치 엄마의 시각이 현저하게 좁아져서 그 눈에는 자폐를 가진 자기 자식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좁은 시각에서는 오해가 일어나기도 쉬운데 아동에게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긍정적 변화도 크게 보는 것이다. 자식이 한번 웃었다고 해서 그것을 크게 호전된 것으로 받아 들이는 부모도 있으며 눈마주침을 하는 것을 발달 장애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부모도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들은 큰 틀에서 보았을 때는 그다지 의미 있는 변화는 아니고 오늘 구름 끼고 내일 비가 오듯 큰 그림은 변화가 없이 작은 잎들이 잠깐 흔들렸다 말았다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요즘에는 일반 사람이 얼른 감별하기 어려운 아동들이 자폐 진단을 많이 받으러 온다. 영국에서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약 1%로 잡고 있으니 적지 않은 숫자가 사회 기술의 장애를 보이는 자페 스펙트럼에 준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부정을 하고 있는 경우에는 의사가 억지로 진단을 내린다고 해서 별로 효과가 없다. 이미 장애 아동들의 어머니나 아버지는 무척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의사가 하는 얘기가 쉽게 비난처럼 들리고 오히려 반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아니라고 부정을 하는 부모에게 가만히 있으면 의사가 자신들에게 동의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기도 힘들다.
드라마에서는 진료를 받는 과정 중에 자식에 대해서 좋은 말만 늘어놓는 엄마를 보고 그러면 왜 전문가를 찾아왔는지 의사가 되묻는 장면도 나온다. 실제 한국에서의 사례를 들어 보면 애들의 문제만 좋아진다면 모든 고민이 없어질 거라는 환상을 가진 부모들이 많은 것 같다. 무슨 치료, 무슨 치료 등을 해서 자식의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엔 공부를 시켜서 좋은 대학을 보내고 훌륭한 규수랑 결혼시켜서 시댁에도 친구들에게도 어깨한번 크게 펴보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바로 이렇게 ‘이것만 바뀌면 모든 것이 좋아 질텐데’라는 생각이 그 나마 바꿀 수 있는 것도 바뀌지 않게 한다. 모든 해결의 출발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암만 자신이 받아들이기 싫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한 변화는 생기지 않는다. 내 자식이 말을 안듣고 말썽만 피우는 것이 집에 맨날 늦게 들어 오는 남편 탓이라고만 생각하면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변화 시킬 수 없다. 모든 변화는 ‘나’에게서 출발된다.
글쓴이 우 이 혁
wooieehyok@msn.com
약력 : 한국 신경정신과 전문의
영국 정신과 전문의 (소아, 청소년, 성인)
정신분석 정신치료사
현재 NHS 소아 청소년 정신과 컨설턴트
영국 왕립 정신 의학회 전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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