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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유학온 학생들은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생활해야 하는데 이 학생들은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되기 전에 완전히 다른 문화권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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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전문의를 하고 다시 영국에 와서 전문의를 딴 경력이라서 그런지 드물지 않게 영국 사립학교 카운셀러나 아니면 당사자의 부모들이 직접 필자에게 전화를 해서 조기 유학을 하고 있는 청소년에 대한 상담을 의뢰한다.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당사자나 부모들만이 아니고 학교 선생님이나 기숙사 하우스 마스터들도 특히 문화가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온 학생들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서 상담을 의뢰하기도 한다.
최근 영국의 사립학교 보딩 기숙사에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많은데 영국 교사들은 극동 지역에서 온 학생들의 사고 방식이나 가치관이 영국이나 유럽의 학생들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에 놀라워하면서도 때론 생활이나 학습 지도에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조기 유학에서 한가지 특이한 단어는 바로 이 ‘조기’라는 뜻이다. 필자는 서른이 넘어 결혼도 하고 가족과 함께 유학을 왔다. 또한 영국내의 많은 대학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오거나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유학하기 위해서 온다. 하지만 조기유학온 학생들은 대개 십대 초반 아니면 중반 이후로 영국에 건너와서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생활해야 하는데 이 학생들은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되기 전에 완전히 다른 문화권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착한 아들은 집이나 학교에서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어른을 공경하면 주위에서 인정을 받고 자기 스스로도 뿌듯하게 느끼겠지만 영국에 와서 이런 식으로 똑같이 하면 자신감 없고 자아 의식이 결핍된 아이라고 취급 받기 쉽다. 이는 자신감 결여와 함께 수치감으로 연결이 되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교우관계에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이런 경우 당연히 성적도 떨어지고 학교생활에도 적응이 잘 되질 않는데 한국에 있는 부모님은 한국에 있을 때의 자식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가지고 있고 똑같은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착한 자식의 ‘틀’을 지켜 나가지 못하는 자식에 대해 몹시 부정을 하고 야단을 치기 때문에 당사자는 한국과 영국 양쪽 어디에서건 환영받지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어른이 되어 주재원으로 가족끼리 온 경우는 조금 다른데 이 경우는 가정에서 이미 한국적 문화가 형성되어 있고 또한 가족들이 몇년 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영국문화에 적응하려 하기 보다는 한국식의 생활방식으로 영국에서 살다가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이 경우 가족들의 아이덴티티는 이미 확실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생기는 혼란도 가족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또한 가족 집단에서 자신의 위치가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학교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빨리 찾을 수 있다.
조기 유학을 온 학생들의 경우 더한 어려움은 자신들의 뿌리가 있는 가족내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연구 결과가 있는 데이터는 아니고 경험적인 이야기인데 필자가 알고 있는 조기 유학생들 중에는 가정에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일찍 외국으로 유학온 경우가 많다. 이 가정내 이유중에는 부모의 불화, 가정 폭력, 부모의 이혼, 시댁과의 갈등 등등 여러가지가 있다.
우리 모두는 낯선 환경에 가면 위협감을 느끼고 긴장을 한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집’이나 ‘부모’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긴장감을 견디고 버틸 수 있다. 이것을 애착이론에서는 secure base 라고 부른다. 아기가 엄마품을 떠나서 이리저리 세상을 탐색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한테 와서 도움을 주거나 자신이 돌아갈 안정된 장소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자꾸 엄마를 기웃기웃하게 되고 아니면 조금만 엄마하고 떨어져도 못견뎌 한다.
만약 유학을 온 청소년이 어린 시절부터 이런 안정된 장소가 결여되어서 불안정 애착을 가지고 있고 또 그런 상태에서 유학을 와서 안정된 가정이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외국에서 다른 십대 청소년과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청소년은 심리 정서적으로 안정된 가정에서 자라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시험 성적이 좋다는 것은 연구결과로 나와있다. 이렇게 보면 조기유학후 적응이 어렵고 심리적 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소년은 시험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처음 유학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이런한 문제들이 두드러지지 않는데 이유는 대개 이러한 청소년들은 아주 수동적으로 자기 감정을 절제하고 적어도 표면적으로 권위를 가진 인물에 대해서 복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얼핏 보면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차적으로 하우스 마스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또한 학생의 성적이 떨어진다.
불행하게도 이런 경우 한국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야단치거나 또한 가디언이나 학교를 원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가디언도 학교도 바꾸도 이렇게 저렇게 방황을 하기 시작한다. 이런식으로 세월이 흐르면 청소년은 자라서 어느덧 대학갈 입시를 준비해야 되는데 영국에서도 학교에 갈 가능성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남학생들의 경우 병역도 문제가 되고 그야말로 동양과 서양사이에 딱 끼여 버려 여기도 저기도 갈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필자가 경험한 조기 유학생들은 당연히 아주 소수이고 또한 필자에게 연락오는 경우는 대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므로 필자의 경험을 일반화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지만 꼭 조기 유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상황에 견주여서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가치는 있는 내용인 것 같다.
글쓴이 우 이 혁
wooieehyok@msn.com
약력 : 한국 신경정신과 전문의
영국 정신과 전문의 (소아, 청소년, 성인)
정신분석 정신치료사
현재 NHS 소아 청소년 정신과 컨설턴트
영국 왕립 정신 의학회 전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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