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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리에르는 모짜르트가 죽고 나면 인생이 편안해지고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게 될 줄 알았는데 자신은 그 이후 인생의 30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신부에게 고백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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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년 전 첫 개봉된 뒤로 끊임없이 사랑을 받아 왔던 이 영화가 얼마 전 로얄 알버트 홀에서 실제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상영되었다. 대형 화면에 배우들의 연기가 얼굴 주름 하나 하나 자세히 보여 주는 덕택에 지금까지 잘 보지 못했던 캐릭터들의 복잡한 감정들을 상세하게 이해하는데 톡톡히 도움이 되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모짜르트를 평생 질투하면서 자신에게 재능을 주지 않은 신(God)을 증오하면서 살아온 살리에리가 말년에 이르러서 과도한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히스테릭한 자해 행동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난 이 첫 장면을 보면서 이것이 인생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부분을 조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이러한 질투와 증오심을 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는지 그리고 또한 자신의 마음속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어떻게 소화해 가면서 살고 있는지가 제 각각 인생을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심리학적으로 따지면 질투심도 여러가지 레벨로 나뉘고 있는데 가장 원초적인 질투심은 자신이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대상이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애기(baby)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엄마가 다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극심한 질투심과 절망을 느껴야 되고 또한 그것이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나 형제 다른 사람하고 나누어야 한다는 숙명을 자각해 가는 과정 또한 견디기 힘든 증오심을 가져다 준다.
이러한 질투심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쟁자들을 없애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차라리 자신이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파괴함으로써 이 질투심을 없애려 한다. 이 정도까지 격렬한 질투심을 가지는 사람은 이 세상이 ‘무엇인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뺏고 뺏기고 또한 없애버리는 것으로만 가득찬 것으로 여겨져서 자기가 가진 것 마저도 풍족하게 누리지 못하게 된다.
또한 이런 상태에서의 죄책감이란 무척이나 잔인하고 두려운 감정으로서 자신의 주머니를 열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머니를 닫고 감추고 도망가거나 아니면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을 더 미워하는데 사용된다. 이런 점에서 살리에르의 죄책감은 자신이 평생에 지은 업보(?)를 갚는데 일생을 사용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도망가거나 오히려 자신에게 재능을 주지 않은 신(God)을 원망하면서 살아간다.
가장 원초적인 질투심은
자신이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대상이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저 노인은 죽을때 참 외롭겠다. 쓸쓸하겠다’내지는 ‘죽을때 저 사람은 천사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와서 무서운 곳으로 데려가는 것으로 느껴지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이나 안타까운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죽기 전에 과연 살리에르가 ‘용서’를 받을 기회가 있었는지도 어쩌면 그것을 활용할 용기가 남아있을지도 각자 인생의 몫이려니 라는 생각도 든다.
이 영화에서 살리에르는 이태리의 한 시골에서 음악가의 일생을 꿈꾸면서 살아 왔으나 자신의 이런 꿈을 무시하고 방해하는 아버지가 갑자기 급체를 하면서 사망을 하는 행운(?)을 겪으면서 비엔나에서 음악가로서 승승장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살리에르는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짓눌려 사는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보여 주는데 프로이트가 이야기 했던 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도 아버지가 아들이 자신의 자리를 넘보고 뺏앗아가면 어떡하나 라는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면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은 날마다 늙어가는 자신에 반해서 하루하루 성장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건강한(?) 질투심을 가져야 하는지도 우리의 정신건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어쨋든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살리에르가 신을 아버지의 자리에 두고 모짜르트와 마치 형제인 것 처럼 경쟁한 것도 그리고 또한 그 신의 표상인 십자가를 불태운 것도 모두 이런 자신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것을 시사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신에게 모든 재능을 물려 받은 모짜르트를 죽이고 그 모짜르트의 음악을 자신이 빼앗아 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후반부에서 살리에르는 모짜르트에게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하고 모짜르트의 음악을 자신의 것처럼 위장할 계획을 꾸민다) 모짜르트를 서서히 죽이기 위해서 살리에르는 죽은 모짜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로 자신이 위장을 해서 모짜르트가 자기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이용한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살리에르는 자신의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모짜르트에게 적용시키고 이것을 효과적인 살해 방법으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모짜르트 아버지 레오폴트로 위장함으로서 살리에르 자신이 자기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었으며 마치 자신이 모짜르트 아버지를 대신하여 모짜르트에게 복수를 하는 것처럼 느낌으로서 자신의 죄책감을 벗어 던지고 있는 것이 너무 생생하게 영화에서 보여지고 있었다. 이렇게 모짜르트가 죽고 나면 인생이 편안해지고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게 될 줄 알았는데 자신은 그 이후 인생의 30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신부에게 고백을 한다. 자신의 음악은 점점 없어지고 모짜르트의 음악과 명성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자신이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것을 하나 하나 빼앗기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질투심에 사로잡혀 탐욕스럽게 빼앗아오거나 아니면 그것도 모자라서 다 파괴시켜 버리는 사람이 자신의 욕심 만큼이나 허전한 배고픔을 느끼는 것을 보면 ‘무엇이든 적당히’ 라는 옛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의 일생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고 어렸을 때 너무 많이 굶은 사람은 조금만 배가 고파도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이런 두려움이 자신의 호주머니를 끊임없이 가득 채우려는 강박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자신의 의지로 조절이 잘 안되는 감정들이 이런 것들이다.
글쓴이 우 이 혁
wooieehyok@msn.com
약력 : 한국 신경정신과 전문의
영국 정신과 전문의 (소아, 청소년, 성인)
정신분석 정신치료사
현재 NHS 소아 청소년 정신과 컨설턴트
영국 왕립 정신 의학회 전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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