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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망’ 상태에서는 대개 공간, 시간 지각력이 떨어지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며 얼마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뭔가 모르게 이상하게 행동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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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망이란 말은 한자어로서 영어로는 delirium이라고 한다. 사전에는 혼돈(confusion)과 비슷하지만 심한 과다행동(예를 들어 안절부절 못하고, 잠을 안자고, 소리를 지르는)과 환각을 동반한 병적 정신상태라고 나와있다. 전문의인 필자가 읽어도 언뜻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어렵다. 어쨌든 오늘은 정신과에 의뢰되는 환자 중에 응급으로 감별해 내어야 하는 것 중에 으뜸으로 치는 이 섬망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정신과(참조로 한국에서는 이제 더이상 이렇게 부르지는 않는다고 한다)가 여타 다른 의학 질병들과 다른 측면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기능성에 촛점을 두는 진단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다른 여타 신체적 질환은 원인에 따라서 세부사항들이 나누어 지고 거기에 따라 각각 이름이 붙는데 정신과는 이러한 원인에 따른 분류보다는 환자들이 어떤 문제들을 보이는 가에 따라서 진단을 내린다. 그래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원인은 대개 불확실하거나 없다.
예를 들어서 정신분열병(이제는 한국에서는 조현병이라고 부른다) 같은 경우에 뇌 사진을 찍어 봐도 이상 병변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단을 내릴 때 뇌의 어떤 부분의 이상이 있어서 진단을 내린 것이 아니고 원인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보이고 있는 증상을 보고 내린 진단이기 때문이다. 자폐증도 마찬가지다. 가끔 머리 사진을 찍어 보자는 보호자들이 있는데 사실 MRI를 아무리 찍어봐도 특별한 병변은 발견되지 않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정신과 진단의 대부분은 원인이 되는 기질적인 이상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과거부터 이런 이유로 차라리 정신과는 뇌의 병이 아니고 마음의 병이라고 했다. 그래서 ‘저 사람 정신이 미쳤다’라고 이야기 할 때의 정신은 brain이 아니고 soul이나 mind에 가까운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이나 정신이 다친 사람처럼 정신과에 오는 환자 중에 사실은 기질적인 즉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뇌의 병변을 가지고 오는 환자들이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임상 상태중의 하나가 섬망이다. ‘섬망’상태에서는 대개 공간, 시간 지각력이 떨어지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며 얼마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뭔가 모르게 이상하게 행동한다. 엉뚱한 얘기나 행동 굼뜬 동작, 갑자기 길을 잃어 버리거나 자기가 뭘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지각이 없고 학교에 있으면 공부하기 위해서 있고 라디오는 듣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 버린다.
이렇게 사람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지 능력이 사라지면 본능적으로 무서움이 많아지고 의심스럽게 변하고 공격성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게 일반적이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중에서는 어쩌면 ‘치매’를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치매를 앓고 계신분들 중에서 이렇게 섬망상태로 종종 빠지는 분들이 있는데 특히 심한 독감이 들어서 감기약을 많이 먹어도 그럴 수 있고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도 이런 섬망을 보이는 수도 종종 있다.
한국에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섬망 상태는 알콜 금단 증상으로 생기는 진전섬망이 있다. 이때는 임상적으로 아주 응급한 상태로서 간질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고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헛것을 보고 현실감 없이 반응하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안전 사고도 생길 수 있다. 이런 알콜금단과 관계 없이 본드 흡입을 많이 하는 청소년들이 이런 급성 섬망상태를 보이기도 하고 영국에서는 대마초나 코카인 등등을 흡입한 뒤에 이런 섬망을 보이기도 한다.
오래전에 보았던 50대 아주머니는 우울한 증상과 말이 별로 없어지고 헛소리를 하는 증상으로 정신과에 오셨는데 37.5도 정도의 미열을 가지고 계셨다.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셨지만 환자의 지각력이 많이 감소되어 있고 갑자기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게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응급으로 척수검사와 피검사를 실행하였는데 결과는 뇌염이었다. 이런 환자가 정신과에 입원하고 있거나 집에 있으면 갑자기 간질 발작이 오고 증세가 점점 나빠져서 생명이 위독해질 수 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로서 이러한 정신병이나 우울증과 섬망 상태를 감별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얼마전에 본 정신 지체 환자도 이미 학교에서 간호사가 보고 동네에서 주치의가 보고 괜찮다고 왔지만 필자가 보았을 때는 허공만 쳐다보고 히죽히죽 웃고 하는 것이 어떤 사람이 볼 때는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섬망 상태에서 헛것을 보고 있었고 히죽히죽 웃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자신이 곤란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고 생각했다. 책을 주어도 뭐하는 물건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진료를 마치고 외투를 입고 나갈 때 엄마가 외투를 줘도 그냥 팔에만 걸치고 있을 뿐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그 환자가 소위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암만 정신지체라도 어떤 형태로든지 대개는 의사 표현을 할 수는 있다. 무서우면 화를 내고 자기가 날뛰고 때리고 하지만 그런 것도 의사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환자는 한 달 전까지는 그렇게 말도 많고 활발한 학생 이었는데 갑자기 ‘멍’하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날은 하루 종일 바쁘게 큰 병원에 전화 돌리고 레터 써서 팩스로 붙이고 얼른 이 학생이 MRI를 찍고 뇌의 검사를 할 수 있도록 조처하는데 시간을 다 썼다. 학교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얼마전에 이 학생이 안그래도 머리가 아프다고 양호실에 와서 약을 달라고 했는데 그때 혈압을 재어 보니 상당히 높은 편이 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더이상 팔로우 업이 되지 않았고 당일 검사한 GP도 별다른 이상을 찾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얼마전 정신지체자들의 평균 수명이 보통 사람들보다 짧은 것이 발표되고 거기에 따른 대대적이 캠페인이 벌어졌는데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
글쓴이 우 이 혁
wooieehyok@msn.com
약력 : 한국 신경정신과 전문의
영국 정신과 전문의 (소아, 청소년, 성인)
정신분석 정신치료사
현재 NHS 소아 청소년 정신과 컨설턴트
영국 왕립 정신 의학회 전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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