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치 않은 두 사람 - 막상막하 좌충우돌 부엌 쟁탈기!
재영교민인 필자 전희원씨가 외국인 시집에서 겪는 문화충돌을 알콩달콩 재미있게 다룬 <싹수없는 며느리 vs 파란 눈의 시아버지>를 약 2개월에 걸쳐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책은 전 세계 모든 요리를 통달했다고 자부하는(!) 파란 눈의 시아버지와, 그의 독재권력 아래서 한국 음식 좀 맘껏 해먹으며 살고자 온갖 잔머리를 굴리는 검은 눈의 며느리가 만들어가는 ‘파란만장 시집살이’ 이야기다.
고집불통에 안하무인이지만 ‘참을 수 없이 귀여운’ 파란 눈의 시아버지와, 남편의 ‘주방독재’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켜줄 세력을 남몰래 기다리던 시어머니. 김치와 고추장을 좋아하는 아군이자 ‘며느리 vs 시아버지의 음식분쟁 전문해결사’인 남편 조시와, 다혈질에 고집불통이지만 의리와 정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검은 눈의 며느리. 이들이 태평양 건너에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언어와 피부와 문화의 차이조차 ‘가족’이 되어 서로 사랑하는 데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책 본문 중>
김치 소동
영국에서 우리끼리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린 후 한 달짜리 휴가를 받아서 처음 캐나다 시댁을 찾았을 때 생긴 일로, <조선김치실록>에 기록될 만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개인적으론, 파란 눈의 시부모님께 한국 며느리의 참한 이미지를 심어드리기 위해 보름 동안 발바닥에 땀나도록 쌓았던 공든 탑이 통째로 무너져버린 안타까운 사건이기도 했다.
남편이 워낙 김치를 좋아해서 김치가 우리 밥상을 떠나본 적이 없는데, 시댁에 온 후로는 부엌을 장악한 시아버지 등쌀에 우리 둘 다 입 안에 가시만 돋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가게에서 분말로 된 김치양념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만지작대며 한숨만 쉬는 날 지켜보시던 시아버지가, 배추와 양념 봉투를 덥석 집어 장바구니에 담으시며 한번 담가보라고 뜻밖의 호의를 베푸시는 것이었다.
그분의 특이한 성격을 이미 파악하기 시작하던 참이라 내심 불안하긴 했지만,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당장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초반부터 불안한 조짐이 비치기 시작했다.
김칫거리를 준비하는 내 앞에 자리를 떠억 펴고 앉으시더니만, “배추가 너무 크니 더 잘게 썰어라”, “직접 담그지 않고 왜 소금에 절이느냐” 등의 잔소리를 하시는 것이었다.
전 세계 요리책을 다 구비해놓고 직접 만들어 드시는 식도락가 시아버지는, 오래돼서 너덜너덜해진 불어판 한국 요리책으로 손수 김치까지 담가보셨다니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 세 개를 새겨가며 자세히 설명해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너 하는 게 요리책하고 다르다!”며 한국인인 나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인하시는 게 아닌가!
결국 “한국 사람인 제가 김치를 더 잘 알지, 아버님이 뭘 아신다고 참견이세요!”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내게 “맛대가리 하나 없을 테니 두고 봐라!”는 악담을 남기고 시아버지는 주방을 나섰고, 저녁 때 풋내가 펄펄 나는 사연 많은 김치를 남편은 눈치도 없이 맛있다고 뽀뽀를 퍼부으며 먹어댔다.
다음 날 아침, 제법 익어서 맛이 든 김치를 병에 넣어 냉장고 한쪽 구석에 잘 모셔두고 여행을 떠났다. 그리곤 3일 만에 돌아와 김치 확인부터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김치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 둘의 궁시렁대는 소리에 주방으로 들어오신 시아버지가 함박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시는 말씀.
“너희들 김치 찾냐? 그게 썩어가면서 냄새를 고약하게 풍기기에 내가 병째 버렸다!”
쩝. 썩어가는 게 아니라 맛있게 익어가는 거였는데….
우리는 그날 밤, 어딘가에서 맛있게 익고 있을 김치 생각에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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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브 북 출판 / 전희원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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