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심장, 화이트홀(Whitehall)
총리관저·주요 행정 부처 늘어 선 영국 정치 1번지 … 국가 유공자 명복 비는 기념비적 공간 변모
▲ 화이트홀은 특정 건물이 아니라 팔라먼트 광장과 연결된 팔라먼트 거리에서부터 동쪽 채링 크로스까지 이르는 거리다.
런던에서 가장 중요한 거리는 어디일까? 어려울 것 같은 이 질문의 답은 의외로 쉽다. 바로 ‘화이트홀’이다. 정확히 말해서 화이트홀은 팔라먼트 광장과 연결된 팔라먼트 거리에서부터 동쪽 채링 크로스까지 이르는 거리다. 그런데 화이트홀을 찾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기 십상이다. 화이트홀이라는 이름 때문에 자연스럽게 건물을 연상하지만 건물은 없을 뿐만 아니라 크게 시선을 끄는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홀이 런던에서 가장 중요한 거리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런던의 역사를 살펴보자. 10세기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영국의 행정을 담당하는 수도는 런던에서 남동쪽으로 100km가량 떨어진 윈체스터였다. 윈체스터가 쇠락하면서 영국 황실은 지정학적 요충지인 현재의 웨스트민스터로 수도와 황실의 이전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웨스트민스터는 영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잡았다. 13세기에 이르러서 헨리 3세에 의하여 ‘화이트홀 궁(The Palace of Whitehall)’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화이트홀이라는 이름의 근원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일대의 건물들에서 주로 사용된 백색 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위치는 현재 호스가드가 있는 맞은편 일대다. 웨스트민스터 궁과 마찬가지로 템스 강을 마주한 최고의 입지조건임을 알 수 있다. 이후 17세기 후반까지 이 지역은 전형적인 황실과 친인척의 거주지역으로 개발되었다. 전성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규모의 황실 거주지역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수백 년 동안 지속된 화이트홀 궁의 영광은 1691년과 1698년에 발생한 두 번의 대화재로 모두 사라졌다. 특히 1698년에 빨래를 말리던 하녀의 부주의로 발생한 화재는 목구조 중심의 튜더 건물들을 모두 집어 삼켰다. 화재로부터 살아남은 건물은 호스가드 맞은 편 오른쪽에 돌로 지어진 뱅퀴팅 하우스(Banqueting House)가 유일하다. 1622년에 완공된 뱅퀴팅 하우스는 영국 고전건축의 선구자인 이니고 존스가 디자인했다. 황실의 연회식장으로 건립된 뱅퀴팅 하우스의 위용은 화이트 홀 궁의 웅장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황실의 연회장답게 뱅퀴팅 하우스는 화려한 장식과 소품들로 가득한데, 그 중에서도 백미는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인 피터 폴 루벤스가 그린 천장이다. 이니고 존스가 디자인한 절제된 고전 인테리어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루벤스의 그림은 장엄하고 환상적인 공간을 연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 화이트 홀이 시작되는 길 가운데 국가 최고의 기념비인 세노타프가 있다. 매년 이곳에서 국가 유공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행사(리멤브런스데이)를 갖는다.
화이트홀 궁의 화려함은 17세기로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이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런던을 대표하는 거리인 화이트홀이 탄생한 것이다. 1732년 조지 2세 왕이 영국 최초의 총리 로버트 월폴에게 다우닝가 10번지를 총리 관저로 선물했다. 이후 화이트홀의 양쪽 거리에는 영국 주요 행정 부처들이 속속 들어섰고, 명실공히 영국 정치 1번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20년에는 화이트 홀이 시작되는 길 가운데 국가 최고의 기념비인 세노타프(Cenotaph: 그리스에서 유래한 묘지라는 의미의 기념비)를 세웠다. 유공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세노타프를 화이트홀에 건립함으로써 이곳은 정치 1번지로서의 상징성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영국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최근까지 인물 및 역사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동상들이 지속적으로 건립되면서 화이트홀은 동상의 거리로도 새롭게 자리매김했다.
로마, 파리, 그리고 베를린 등 화려한 제국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도시들에는 어김없이 도시를 대표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거리가 있다. 웅장한 개선문과 끝없이 뻗은 대가로 등을 통하여 도시의 상징성과 자존심을 드러낸다. 런던에는 이와 같은 거리가 없다. 대신에 화이트홀이 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궁전이나 화려한 개선문은 없지만, 상징성만큼은 어떤 거리에도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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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정후(건축가, 런던정경대학 튜터)
약력 : 경희대학교 건축공학과 학부 및 대학원 졸업.
디자인 스튜디오 O.N.E 소장 / 건축 비평가
영국 바쓰대학 건축학 및 런던정경대학 도시사회학 박사과정 수료
저서 : <공간사옥>(공저, 2003),
<작가 정신이 빛나는 건축을 만나다>(2005)
<상상/하다, 채움의 문화>(공저, 2006)
<유럽건축 뒤집어보기>(2007)
활동 : 현재 디자인과 강의를 하고 있으며 조선일보, KBS, SBS의 디자인 프로그램 자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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