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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6 남자다움의 문화
코리안위클리  2008/12/17, 23:09:37   
▲ 사립학교의 개혁을 선도한 토머스 아널드(사진 왼쪽)가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은 인격 함양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축구 같은 단체경기를 활용했다. 1860년대 영국 사립학교 학생들은 축구 등 단체 경기를 통해 남성다움을 키웠다.
사립학교, 기독교적 도덕성과 스포츠 통해 남성성 훈련
보이스카우트, 개인과 순결한 남자다움·체격 강조


영국 하면 흔히 영국 신사를 떠올린다. 영국의 중간계층 남성들은 어릴때부터 영국 신사의 이상을 흠모하도록 교육받는다. 신사의 이상은 점잖고 예의바를 것, 자존심을 지킬 것, 과묵할 것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을 것 등의 행동규율을 요구한다. 이에 따르면, 특히 영국인은 공민으로서의 의무와 노력을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하며, 조국과 자신이 속한 제도에 최우선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 또한 신사는 가능한 한 자신의 능력을 감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감정도 감추어야 한다.
‘신사gentleman’은 ‘젠트리gentry’와 동일한 어원을 가지며 따라서 원래는 먹고살기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런 의미에서 ‘신사’의 이상은 사회 엘리트층에 국한된 것이었다.
19세기 들어 중간계급이 세력을 얻으면서 엘리트층의 신사다움과 조금 다른 의미의 ‘남자다움manliness’이 남성성의 이상으로 부각되었다. 이후 남자다움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고 가장 소중하게 숭배되는 가치 가운데 하나로 군림했다. 남자다움은 신사다움보다 보편적이었다. 신사가 될 수 없는 천한 신분이라도 ‘남자다운’ 남자는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남성성은 기독교적 성숙함을 받아들여, 경건·정직·진실성 그리고 이기적이지 않은 인격체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후 육체적 힘, 근육, 굳게 다문 입술, 모험, 인내 등과 연결되었다. 그러한 남성성의 성립 과정에서 사립학교와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의 새로운 남성성을 만들어 낸 곳은 단연 사립학교public school이었다. 사립학교는 기독교적 도덕성과 ‘스포츠 애호주의athleticism’를 통해 남성성을 훈련시켰다. 사립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된 스포츠 경기는 남자다움을 조장하고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으로 간주되어 널리 장려되었다. 그리고 스포츠는 점차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되었다.
스포츠는 모든 영국인들에게는 육체적 강건함뿐만 아니라 ‘공정함’이라는 단어를 제공해 주었는데 ‘패배는 용감하게, 승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 핵심이었고 그것이 곧 남자다움의 구현으로 인식되었다.
나아가 남자다움은 영국인들에게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세상의 꼭대기에 오른 영국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인종’이라고 자부했다. 영국이 거둔 경제적·정치적·제국적 성공의 뿌리를 남성적 자질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남자다움을 예찬한 영국 사회에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많은 수의 동성애자들이 발견되는 것은 그야말로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의 운동장에서 쟁취되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1850년 이후 사립학교의 남성성 훈련은 전적으로 스포츠를 통해 이루어졌다.


스포츠가 함향한 중요한 가치중 하나는 단체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정신이었다. 크리켓이나 축구 등의 단체경기가 강력한 집단적 충성심을 유발하는 것은 자명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남성적 체격의 완성도를 높인다는 이유에서 체조가 강조된 데 반해, 영국에서는 예외적으로 단체경기가 남성성 교육의 관건으로 간주되었다. 자율적 개인이라는 개념은 허용되지 않았다.
단체의식과 페어플레이 정신은 경기장의 테두리를 넘어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스포츠 애호주의와 냉혹한 제국주의적 남자다움의 고양이 너무 지나쳤다고 판단되자, 20세기 초에 단체 활동보다는 개인과 순결한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물론 육체적 강건함은 당연한 요소였고, 보이스카우트를 조직한 배든 파월이나 ‘백인의 짐’을 노래한 키플링은 남성적 덕목에 ‘훌륭한 외모’를 결부시켰다.
순결한 남자다움과 훌륭한 체격을 강조하는 그러한 납성성은 보이스카우 운동에서 절정에 달했다. 배든 파월이 쓴 <소년들을 위한 보이스카우트>(1908)는 첫 장부터 남자다움과 군대적 성격을 띤 스카우트를 강조한다. 훈련을 사냥꾼, 모험가, 식민지 변경인의 삶과 동일시하면서 야외 훈련을 중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전의 남성성과 다른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는데, 즉 스카우트 훈련이 단체경기를 강조하지 않으며 고도로 개인주의적이라는 점이다. 단체경기보다 걷기, 등산, 배젓기 등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특별히 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았다.
1930년대에 이르러 남자다움이라는 개념은 신빙성을 잃게 되었다. 남자다움의 기원이었던 문화적 풍토가 변하고 있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장기적 사회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종교적 실천의 쇠퇴, 찰스 다윈 이후 세력을 떨쳤던 우생학적 사고의 후퇴, 스포츠가 강요하는 단체윤리에 대한 거부감, (보이스카우트에서 드러나듯이) 야외활동에 대한 좀더 개인주의적인 태도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생겨난 냉소주의 등이 기존의 남자다움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빅토리아 사회가 숭상한 남성성의 이상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한 이상에서 배제당한 사회집단들도 있었다. 중간 계급의 남자다움에 동의하지 않은 하층 노동계급은 다른 식의 좀더 거친 남성성에 집착했다.
19세기 영국인들은 경쟁, 정확히 말해 ‘공정한 경쟁’의 윤리를 숭상했고 그것으로 인해 영국이 번성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국의 번영과 위상이 흔들리자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인 남성성 역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적 강건함이 쇠퇴하자 근육과 마음의 강건함도 함께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 박지향(朴枝香) 교수는
195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1978),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유럽사학 1985), 영국사학회 연구이사
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저서: ‘영국사’‘제국주의’‘슬픈 아일랜드’‘일그러진 근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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