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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10 처칠, 유럽의 영웅
코리안위클리  2009/02/11, 23:14:12   
▲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앞에서 후세들을 굽어보고 있는 동상처럼 처칠은 어느 인간보다도 ‘거대한’인간이었다.
세대를 넘어 불굴의 의지·위험에
직면하는 용기 지닌 역할모델


지난 2003년 유럽 6개국, 즉 영국·독일·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폴란드를 대상으로 실시된 ‘19세기 이후의 유럽 위인들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놀랍게도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1874~1965)이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퀴리 부인과 드골이 그 뒤를 이었다. 영국 내 설문조사에서 처칠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지목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해외에서조차 처칠이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선정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가 행한 역할이었다. 유럽이 히틀러에게 거의 완전히 굴복했을 때 결연하게 고독한 투쟁을 이끈 처칠의 존재 없이 오늘날 유럽의 번영은 불가능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밖에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중략) 우리의 목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는 것입니다”라는 감동적인 웅변으로 국민을 독려한 처칠은 카이로와 테헤란, 얄타로 동서분주하며 전쟁과 평화, 전후세계의 운명을 주도한 탁월한 국제적 정치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건재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처칠은 식민지 독립과 여성해방에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며 전쟁 동안에 그가 펼친 정책 때문에 오히려 영국의 강대국 위상이 몰락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다.
이처럼 ‘구세주’라는 호평에서부터 국가의 위상을 훼손시킨 사람이라는 비난까지 받는 논란의 인물이 바로 처칠이다. 1990년대까지 그에 관한 글이 무려 3천 편 넘게 쓰였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처칠은 영국 현대사를 압도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생존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여전히 어려운 실정이며 조심성이 요구된다.
영국 처칠은 1940년이 되어서야 탄생했다고 일컬어진다. 1874년생 이니 66세가 되어서야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 2년 전만 해도 처칠의 인생은 실패작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의 경력은 긴 생애만큼이나 다양했다. 62년에 걸친 하원의원직, 30년에 가까운 각료직(상무부·재무부·내무부·식민부·해군·육군 및 공군) 그리고 8년여의 총리직을 역임한 그에게 많은 공과가 있었음은 당연하고 평가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에 남은 처칠의 궁극적 이미지는 영국과 유럽을 나치즘으로부터 구해준 영국의 영웅이자 유럽의 영웅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어떤 메세지도, 어떤 비전도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전쟁 지도자가 아니라 불굴의 의지와 위험에 직면하는 용기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처칠은 세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역할모델로 그리고 신화로 남아 있다.
처칠에게는 뚜렷한 양면성이 발견된다. 그의 성격 한편에는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면밀하게 계산하여 장기적 준비를 통해 위험을 타개하려는 현실주의자가 있었다. 다른 한편, 그는 여전히 기적을 바라는 도박사이면서 총동적인 소년이었다. 성급함·조급함·고집스러움·기발함 등은 약점이었다. 반면 그는 머리회전이 매우 빨랐고 정치인으로서의 용기와 결단력을 갖추고 있었다.
역사상의 처칠이 신화 속의 처칠과 항상 같지는 않지만, 그는 자신이 도전과 결의의 인물임을 확실히 입증했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설정한 우선적 목표는 히틀러의 제3국을 패배시키는 것이었다. 처칠은 그 목표를 일편단심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그 목표를 달성했다. 물론 대가도 컸다. 그가 이끈 대독 전쟁의 승리는 매우 비싼 값을 치렀다. 그러나 패배의 대가는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영국이 패배했다면 나치가 유럽을 영구히 지배하고 영국은 그런 유럽의 곁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그 일부가 되고 마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노동당 당수를 역임한 마이클 풋이나 거물 좌파 정치가인 토니 벤 조차도 ‘처칠은 위대했다’고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처칠은 무엇보다 다층적 인간이었고 다양한 목표를 위해 다양한 층위의 청중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할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이 점이 아마도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의 레토릭은 공격적이고 도전적이었지만 그는 사실 타협과 화해를 선호했다.
처칠은 그를 둘러싼 신화가 그려내는 식의 1차원적 인간이 아니라 3차원적 인간이었다. 그는 급진주의자면서 보수주의자였고 계급사회를 인정했으면서도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았으며 나라를 구한 지도자였으면서 조국의 쇠퇴를 지켜봐야 했던 정치인이었다.
또 그는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나 경력을 시작했다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꾸준한 역사 공부를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한 예로, 그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됨됨이를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채고 그에 대처하고자 했다.
처칠은 위인이었다기보다 거인이었다. 지금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서 후세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는 실물보다 몇 배 큰 동상처럼 그는 어느 인간보다도 ‘거대한’ 인간이었다. 거대한 만큼 업적도 실수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컸다. 처칠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인물에게 어떤 잣대를 적용해야 하는가를 숙고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과 역사적 과정의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는 옭은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칠의 생애와 그에 대한 기억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필자 박지향(朴枝香) 교수는
195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1978),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유럽사학 1985), 영국사학회 연구이사
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저서: ‘영국사’‘제국주의’‘슬픈 아일랜드’‘일그러진 근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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