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헤어졌던 젊은 날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떨리는 가슴 부여안고 이 글을 씁니다. 먼저는 창간 14주년인 2005년의 이 봄에 지령 700호를 맞이하는 코리안위클리의 늠름한 오늘을 축하하는 글을 멀리 고국에서나마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0년 1월 영국 땅을 떠나오기 전, 2년 반 동안 연재해 오던 필자의 컬럼 ‘서풍부(西風賦)’는 99년 12월 23일자 83회 분을 끝으로 막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코리안위클리와 그 독자들과 필자와의 해후는 어언 5년 3개월 만에 이뤄진다는 것을 헤아리고 나니, 가는 세월의 무상함이 필자의 감상벽을 자극하게 돼, 이 무딘 가슴 떨리도록 센티멘탈해진 것이지요.
지난 91년 초여름 7월 11일, A4용지 4매 정도의 창간호가 나온 이래 매주 횟수를 거듭하면서 달을 보내고, 해를 넘기를 몇 차례... 세월의 강을 또 넘고 건너 5년, 10년의 기나긴 세월 속에 100호, 300호, 500호를 발행하더니만, 어느덧 해외의 동포언론 주간지로선 감히 이뤄낼 수 없는 700호 발행의 값진 기록을 우리의 코리안위클리가 세우다니 정말 자랑할 만한 위업이 아니겠습니까. 한 장짜리 정보지에서 출발해 3만 5천 여 명 재영 동포 사회의 구심점이자 생활의 길잡이, 대변지로 우뚝 서기까지의 갖은 노력과 그 간난 속 지나온 도정이 세상의 그 어떤 내로라하는 일류 신문보다 오로지 광고 수입만으로 재정적 기반을 지탱해 온 무가지 코리안위클리에서 더 값지고 귀중하지 않습니까?
가슴 속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머금고 힘찬 격려 받아 꽃망울 터뜨린 꽃송이 송이들이 지금 저의 마음 밭에 활짝 피어남에, 게서 한 아름 따다가 축하의 꽃다발을 고이고이 엮어 보냅니다.(거기 눈부신 황금빛 수선화가 활짝 피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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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들은 아름다웠지요
그래서 저는 그대들을
기억하고 있었지요
개똥지빠귀는 동트자 노래 불렀고요
그도 기억하고 있었겠지요?
바람은 맑고 싱싱하게 불어왔고
태양은 더욱 밝게 빛나기
시작했답니다.
바다 위에서 반짝이는 것처럼
저는 당신을 생각했고,
당신을 기억 했었지요
그리고 지난 일들이 어떻게
변함없었는가도 기억했답니다.
구름이 저만치 먼 구릉들 위에
낮게 드리우자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은 빨라졌지요.
하지만 나의 생각은 상금도
당신에게 달려갔답니다.
과거의 추억들을 함께 데불고
오는 봄은 이제 마법의 베를 짜지요
내가 보는 것과 행하는 것
모두를 엮어서,
그러나 저는 오는 이 봄을
내 가슴 속에 간직할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 그대를 기억하며; 아이리스 헤셀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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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위클리 에게 보내는 이 연서를 쓰면서 먼저는 리치몬드 파크며, 하이드 파크내 숲속에서 환한 얼굴 내미는, 그리고 멀리 잉글랜드 북서부 호반지역(래이크 디스트릭) 그리스미어 호수 근처에 자리한 시인 윌리엄 워드워드의 집 도브 코티지의 정원에도 이맘 때 쯤이면 어김없이 피어오를 수선화 군락의 원무(圓舞)를 눈 앞에 그려 봅니다.
그리고 야인시절 해마다 섣달 그믐 무렵, 런던 시내 유서 깊은 고서점 해처드의 삐걱이는 2층 나무 층계를 올라 손에 넣곤 했던 아름다운 시화집 爐邊의 書(노변의 서;The Fireside Book) 98년 판에 실린 옛 시인의 시가 불현듯 떠오릅니다. 그것은 시인이 젊은 날 연인과 함께 느꼈던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 그 수선화와 해마다 어김없이 함께 춤추며 오는 봄을 그려내고, 그러나 이제는 가고 없지만 그리운 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다짐으로 홀로 남은 자신을 추스르는 것이 지난 5년 반 동안이나 다시 돌아가지 못한 영국 땅, 그곳의 정든 벗 코리안위클리와 그 충실한 독자 제현에 대한 필자의 그리움 속 변함없는 애정의 다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 그리움은 재영 동포들에게 이민생활(移民生活), 기업전선(企業戰線), 유학생활(留學生活)에 격려와 힘을 안겨주고 있는 뉴스와 정보 속 인물들과 그들의 목소리가 700호에 이른 코리안위클리의 갈피갈피 마다에 아직도 살아 있기에 더욱 절실합니다. 그리고 97년 말 고국에서 불어왔던 IMF의 삭풍(朔風)·한파(寒波) 속에서 필자도 어렵게 마음 다잡으며 썼던 컬럼으로 교포사회가 경제활동의 위축과 경제 위기를 극복, 모두가 함께 살아갈 용기와 자신감을 일깨웠기에, 또 교포사회의 한과 슬픔, 시련과 좌절을 교민들의 하나된 마음과 합력으로 이겨나갈 것을 코리안위클리는 앞장서서 이끌며 달려갔기 때문에 한 때 위클리의 고정 컬럼니스트였던 필자에겐 위클리가 지구촌 600만 동포사회의 400여 언론 매체 가운데 우뚝 선 오늘이 가슴 뿌듯한 감격으로 다가 옵니다.
거의 1세기에 이르는 한국인의 영국 이주 교민사에서 특히 700호 코리안위클리가 함께 한 지난 14년은 어떠했습니까? 조국의 발전과 성장, 그리고 그러한 진전이 있기까지 겪은 정치, 경제, 사회적 진통과 시련의 세월이 그렇듯 재영 한인들에게도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였습니다. 그 14년을 코리안위클리는 동포사회와 함께 웃고, 울며, 때로는 분노하고, 슬퍼하며, 지난 10년 새 거의 3배로 팽창한 교포사회의 밝고 빛나는 발전과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또 어둡고 더럽고 불합리한 것들에도 날카로운 지적을 잊지 않고, 발전적 관심을 보여 왔던 것을 필자는 현장에서 또는 멀리 워싱턴과 서울에서 직간접으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자칫 주재국 정부와 사회가 유색, 소수 이민사회를 향해 휘두르는 편견과 오만의 쇠사슬을 끊고자 교민 사회의 권익 신장과 한국인의 정체성 유지, 인권 옹호를 위해 단호하지만 조용한 목소리를 견지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주재국내 이민사회 지역 언론의 재정적 취약성, 취재의 제약 속에서도 초창기의 단순한 정보지, 소식지에서 탈피, 지난 몇 년 새 한국 교민사회의 화합과 단결을 바탕으로 주류사회에서의 한국민 대변과, 권익 옹호등 언론 본연의 사명을 인식하기 시작한 코리안위클리의 당당한 자세는 앞으로 700호 이후 코리안위클리가 지구촌 범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동포언론의 전형으로 자리 매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지난 98년 여름 유학생 이승준 피살 사건과 99년 늦가을 패딩턴 열차 충돌 사고로 끝내 병원에서 숨진 예비 교포 법조인 고 하선영양의 비극적인 죽음을 둘러싼 당시의 보도와 논평이 그러했고, 오늘의 영국을 살아가고 있는 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찾아 그 삶의 궤적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교훈을 던져주었던 인기 연재 인터뷰 ‘코리안위클리가 만난 사람’ 등이 그 가능성을 증명해 주었지요.
또 2000년 이후 연재되고 있는 김은혁, 김남교 두 컬럼은 한 분은 잔잔한 음악처럼 독자들의 무딘 마음을 진무(鎭撫)하면서 삶의 진리를 일깨우고, 또 한 분은 촌철살인(寸鐵殺人), 예리한 문제점 파악과 그 방향 제시에서 뛰어 납니다. 비록 사설은 없지만, 이 두 분의 컬럼을 통해서 위클리는 다른 지구촌 한인사회의 동포 언론과는 달리 단순한 정보 나열지가 아닌 언론 고유의 빛과 소금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익이 착종(錯綜)하는 동포 사회를 한데 묶는 화합의 끈 역할을 모색해 나가는데 있어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확신 속에서 우리의 독자 제현들께선 코리안위클리의 발전과 미래가 바로 영국은 물론 프랑스까지를 아우르는 범유럽 한인사회의 번영과 성장이라는 인식 아래 ‘교민의, 교민에 의한, 교민을 위한’ 바로 ‘내 신문, 우리 신문’으로 만들어 가야 하며, off-line 뿐 만 아니라 on-line에서도 부단한 양방향 의사 소통과 열린 대화의 장이 매주 코리안위클리를 통해서 활발하게 전개될 것을 바랍니다.
이 연서의 마지막 대목에선 이처럼 기념사나 축사를 작성하는 것처럼 딱딱하게 됐지만, 지금 다시 700호를 발행하는 코리안위클리의 지난 세월과 오늘의 감격을 생각합니다. 그 기쁨은 워즈워드가 읊었던 것처럼 지금도 ‘하늘 높이 골짜기와 언덕 위를 떠도는 구름처럼 헤매는’ 필자의 가슴 속 호만(湖灣)에 줄지어 뻗쳐 있는 수선화들이 추어대는 환희의 춤으로 다가 옵니다.
그래서 수선화 피는 계절에 의미 있는 날을 맞게 된 코리안위클리와 독자 제현들을 다시 생각하며, 필자의 마음도 기쁨에 넘쳐 수선화와 함께 춤을 춥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이 뜻 깊은 날을 코리안위클리와 함께 즐거워 하시기를... 그리고 위클리와 함께 하는 영국 생활이, 유럽 생활이, 이민의 삶이 그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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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물도 그 옆에서 춤을 추었으나,
환희에 있어 수선화는
반짝이는 물결보다 뛰어 났다.
이러한 즐거운 벗들 속에서
시인이 즐겁지 않을 수 있으리랴!
나는 보고 또 보았다,
그러나 그 광경이 나에게
얼마나 값진 것을 가져왔는지를
미처 몰랐었다.
- 수선화; 윌리엄 워즈워드,18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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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준 엽
전 해외 홍보원장 / 주미 홍보공사
jy801017@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