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재벌, 족벌언론의 불법거래
“과거의 일이라 치부하지 말라. 반드시 풀고 대비책을 만들어야 할 현재와 미래의 한국사회 중대사안이다”
97년 대선직전, 족벌신문과 재벌, 한 대선후보진영 사이에 오간 불법금전거래와 관련한 녹취록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선거에서 엄정중립을 표방하는 신문사 사장이 버젓이 대통령 만들기에 깊숙이 개입하며 거대재벌과 뒷거래를 하는 모습은 오늘날 대형 족벌신문이 왜 독자로부터 외면받고 있는가를 웅변한다.
이런 내용을 취재한 이른바
의 ‘이상호 X파일’은 거대 재벌의 막강한 자본력과 법적 대응에 위축돼 수개월간 보도조차 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조선일보> 등이 먼저 보도하고 난 뒤 관련뉴스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신중한 보도태도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는가하면 상당수는 용기 없는 보도행태라고 비판하는 듯 하다. 신문이 승리하고 가 패배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충분히 이유있는 주장이다.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어느 신문, 어느 방송의 특종 혹은 성패에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다.
이 사안에 대해 너무 많은 내용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어 조금 혼란스런 측면까지 있다.
이 사건은 97년 대선 때 벌어진 사건이지만 오늘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지며 우리사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차원에서 하나씩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 공영방송임을 포기하려는가
먼저 의 취재 후 보도까지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입장에서는 이 테이프를 불법으로 직접 취재한 것은 아니지만 무능한 정권(김영삼 정권)하에 부도덕한 국가기관(안기부)이 불법으로 개인의 사생활 부분을 도청한 내용을 입수한 데서 고민은 출발한다. 당연한 고민거리지만 고민의 시간이 너무 길었고 특별취재반도 너무 늦게 구성됐다.
더 잘못된 것은 결과적으로 보도여부를 보도국 자체판단이 아닌 법원의 판단에 위임한 꼴이 됐다. 편집권을 포기하는 행위가 된 것이다. 공영방송에서 민간신문사보다 더 엄격한 ‘자기검열(self-censorship)’이 이루어지는 것은 공영방송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향후 는 자문변호사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심도있는 고민이 있어야 하며 보다 분명한 내부보도강령이 있어야 한다.
다음은 불법자료를 입수하여 보도하면 불법 보도인가 여부다. 일률적으로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언론관련 판례를 보면 불법취재를 하여 보도하더라도 반드시 불법보도라고 법원은 판단하지 않는다. 이 경우 불법취재에 대해 법원판단 시 몇가지 고려사항이 있다. 당시 취재상황에서 불법 외에는 다른 취재방법이 없었는가, 불법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 그 내용의 공공성과 공익성은 과연 담보되는가, 사적인 목적은 없었는가 등이다.
이상호 X파일에 한정해서 문제를 보자면, 이 자료는 가 불법취재한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이 불법작성한 것이다. 더구나 그 내용은 정치권력과 언론권력, 거대자본이 한통속이 돼 불법과 반칙을 통해 공정보도를 무력화시키고 유권자의 권리행사에 악영향을 주는 내용으로 공공성과 공익성이 담보되는 ‘고발성 보도내용’이다. 보도를 하되 어떤 형태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가 논의되면 될 사안을 질질 끌어오다 결과적으로 타 언론사에 명분도 실리도 뺏긴 셈이다. 그것보다는 가 과연 시청자들의 기대와 요구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던가를 자성해야 할 부분이다.
중앙일보가 가야 할 길은
이와 관련한 <중앙일보>의 보도행태는 과연 용납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짚어볼 문제다. 의 방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한 당사자인 전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 주미대사. 지난 4월 족벌신문사 사주가 어느 날 주미대사라는 공직에 발탁되자 ‘권언유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나왔다. 더구나 홍대사의 재산공개과정에서 본인과 선친, 모친, 부인 등 가족이 총동원돼 ‘부동산 위장전입’을 하는 등 반대여론이 비등했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이를 축소보도하며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중앙일보> 문창극 논설주간은 홍대사 내정에 대해 지난해 12월21일자 칼럼을 통해 “다른 일에는 이런저런 비판을 잘하면서 내 회사 회장이라 하여 할 말을 못하고 쓸 말을 못 쓴다면 그것은 <중앙일보>의 불행이며 독자를 실망시키는 일”이라고 큰소리쳤다. 그 이후 <중앙일보>가 보여주는 보도행태는 전형적인 재벌그룹의 대변지이자 홍대사의 홍보지로 변한 모습이다.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중앙일보>만이 대부분의 언론과는 대조적으로 ‘방영금지’ 운운하고 있을 뿐이다. 공정보도를 외면하며 자사이기주의에 함몰된 이런 신문이 한국사회의 주류신문이 된다는 것은 <중앙일보> 독자에 한정된 불행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의 비극이 된다. <중앙일보>가 홍대사에 대해 비판할 수 없다면, 삼성그룹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할 수 없다면 미래 한국언론을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노무현 정부는 이 사건의 한 당사자인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임명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부동산 위장전입과는 차원이 다른 권언유착과 경언유착의 장본인으로 한국사회의 불법과 반칙을 어두운 커튼 뒤에서 획책했다는 점은 묵과하기 힘들다. 더구나 그는 현재 주미대사의 신분이면서 벌써부터 유엔 사무총장출마 운운하고 있다.
주미대사직은 한국의 이익을 위해 뛰어야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에 출마하려면 그 실질적인 인사권을 행사하는 미국에 잘 보여야 한다. 미국의 국익을 먼저 챙기는 한국의 주미대사들은 그동안 많이 봐왔다.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의 공직에 나서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고 그 가진 것으로 인해 지은 죄가 가볍지 않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참여정부가, 권언유착은 안된다고 틈만 나면 소리치던 노대통령이 홍대사와 짝짜꿍 호흡을 맞추는 모습은 미래를 어둡게 한다. 노대통령은 ‘원칙과 정의’를 주창하던 초심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김창룡 교수
인제대학교 언론정치학부
cykim2002@yaho.co.kr
김창룡교수는 영국 런던 시티 대학교(석사)와 카디프 대학교 언론대학원(박사)을 졸업했으며 통신 서울특파원과 국민일보 기자, 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 인제대학교 언론정치학부 교수 겸 국제인력자원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이다. 198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1991년 걸프전쟁 등 전쟁 취재경험이 있으며 <매스컴과 미디어 비평>등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