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 숙연해진다. 죽음조차도 조작과 거짓으로 회칠하려는 시도는 그가 누구든 어떻게 사망했든 정당화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일개 범인의 사망이 아닌 대재벌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리따운 막내딸의 갑작스런 요절은 국민적 관심사이며 당연히 언론의 취재대상이 된다. 그런데 삼성측은 처음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이를 언론에 알렸고 언론은 결과적으로 오보를 했다. 국민을 상대로, 세상을 상대로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죽음에 관한 정보조차도 조작할 수 있다는 삼성의 발상은 가히 세인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막내딸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가장 아프겠지만, 이회장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전에 알았든 몰랐든 이제 딸의 사망조작은 갖은 추측과 억측이 난무하는 화제거리가 된 셈이다. 유언비어나 오보가 만들어지는 메카니즘에는 크게 두가지 원인이 있다. 삼성이 시도한 것처럼 취재원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할 때 여기에 언론의 확인이 쉽지 않을 때 결과적으로 오보가 된다. 또 하나의 경우는 정보의 수요, 공급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유언비어는 난무하고 각종 소문과 추측, 왜곡보도가 춤을 추게 된다. 정보의 수요는 많지만 공급이 극히 제한될 때 이런 현상은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막내딸인 윤형(26)씨는 지난 18일 뉴욕 인근에서 ‘치명적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삼성 미국법인 소식통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삼성 미국법인 관계자는 현지 언론을 상대로 “윤형씨가 지난 11월18일 뉴욕 인근에서 치명적 교통사고로 의학적으로 사망상태”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망 일주일만에 교통사고가 아닌 ‘자살’이라고 국내 각종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고 삼성측에서도 이를 시인하는 모습이다. 다만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성한 소문만 나돌뿐이다.
이에 앞서 삼성측은 인터넷 등을 통해 ‘자살설’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오자 “사실무근”, “망자(亡者)와 가족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며 강력하게 차단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의 기획으로 왜 이렇게까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의 초일류기업의 구시대적 발상은 삼성을 부끄럽게 한다.
먼저 불행하게 목숨을 끊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무시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이유로든 자살은 용납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사실을 조작하여 ‘교통사고’운운 하는 것은 지나친 살아있는 자의 편의주의 소산이다. 초일류기업의 최고경영자의 가족사가 이처럼 작위와 위선으로 얼룩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사회 진정한 엘리트 정신에 역행한다는 점에서도 비판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 거짓말에 직, 간접으로 가담한 삼성관계자들의 시대착오적 ‘놀라운 발상’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함의를 담고있다. 미국의 교통사고라면 원인과 사고장소, 사건처리 결과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언론이 당연히 취재하리라 예상했을텐데 왜 그런 명백한 거짓말을 시도했을까. 한국에서처럼 삼성은 법도 언론도 ‘삼성의 뜻대로’ 통제하고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정보화 사회, 네트웍이 강화된 사회에서 삼성이 발전시킨 전자기기를 통해 삽시간에 쉽게 뉴스가 전세계를 관통하는데… 삼성의 이런 무소불위의 한국적 발상이 한국민을 놀라게 하고 미국민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런 사실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자살의 원인으로 ‘X파일 사건’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아버지에 대한 생각 등을 연계시키고 있다. 참으로 이것은 언론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이제 겨우 자살이란 내용이 나왔고 그 원인은 아직도 베일이 싸여있다고 본다. 물론 결혼을 둘러싼 가족간의 갈등 등의 이야기가 그럴 듯하게 나오고 있으나 사실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언론은 이제부터 오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자살의 정확한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취재경쟁을 벌일 것이다. 취재원의 ‘계산된 거짓말’에 대한 언론의 반격이 시작된 셈이고 이는 삼성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삼성은 법적 대응이라는 무기를 수시로 흔들겠지만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져든 셈이다.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X파일 사건’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돈으로 권력을 사려고 불법정치자금을 처남이자 전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씨를 통해 대선후보에 전달했던 내용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며 유권자들의 헌법적 권리를 유린하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지만 홍전회장은 검찰조사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회장은 아예 이 문제와는 무관한 것처럼 측근들은 증언하고 있다. 역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이것이 통용됐고 그 누구도 조작과 거짓을 밝혀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삼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자랑스런 기업임에 틀림없다.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삼성의 이미지가 더욱 빛나고 유명해지기를 대다수 한국인들은 바라고 있다. 따라서 삼성이 윤리경영에 앞장서서 진정한 초일류기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삼성가족만의 바람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70년대식 정보조작과 통제, 국민을 상대로 어떤 거짓말도 ‘진실로 만들 수 있다’는 오만한 발상은 삼성의 암덩어리로 내재하게 될 것이다. 이 암덩어리를 제거하지 못하게 되면 미래의 삼성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 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김창룡 교수
인제대학교 언론정치학부
cykim2002@yaho.co.kr
김창룡교수는 영국 런던 시티 대학교(석사)와 카디프 대학교 언론대학원(박사)을 졸업했으며
통신 서울특파원과 국민일보 기자, 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 인제대학교 언론정치학부 교수 겸 국제인력자원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이다. 198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1991년 걸프전쟁 등 전쟁 취재경험이 있으며 <매스컴과 미디어 비평>등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