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선 강북한국학교 교장선생님을 떠나 보내며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다섯번도 넘게 바꼈을 53년의 긴 세월동안 외길을 걸어온 참된 스승, 정구선 교장 선생님!
1955년 정 선생님은 19세의 나이로 교직생활을 시작하셨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스승에 대한 인식도 다섯 번이나 변화를 거듭한 강산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몇곱절 더 변화를 겪었다.
군사부일체라는 믿음과 함께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던 우리 부모세대는 스승님께 ‘죽지만 않게 때려 주시며 올바른 사람으로 키워 달라’고 자식교육을 일임했다. 그러나 내가 교직생활을 중단했던 1999년에는 ‘학생체벌금지’라는 조항과 함께 체벌을 가했던 몇몇 선생님들이 법정에 세워졌으며, 금품수수방지대책의 일환으로 스승의날엔 기념식도 폐지, 그 이후에는 심지어 학생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선생님도 생겨나게 되었다.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교사였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시절, 또 다시 걷게 될지도 모르는 교직의 길이 영 내키지 않았던 그 시절 나는 정 선생님과의 만남을 갖게 되었다.
나는 새로 부임한 국어교사로서 Hendon에 있는 어느교회의 허름한 강당에서 정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무색할만큼 강북런던 한국학교는 복사기 하나 갖추지 못했고 교실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책걸상 칠판을 비롯한 낡은 교육시설과 부적합한 교육환경은 한국인으로서 비애감에 젖게 하기에 충분했다.
곱고 늘 단정한 차림의 정 교장선생님,
30년 넘는 세월을 토요일마다 쉬지도 못하시고
당신에게 재정적 도움이 되기는 커녕 학교 재정후원을 얻기 위해
주중에는 발품까지 팔아야 하는 그 생활을 왜 인내하시는지…세계경제 10위권 안에 든다는 경제력을 가진 대한민국이, 세련되고 반짝이는 핸드폰과 텔레비젼으로 외국에 사는 우리 한국인들의 어깨를 우쭐하게 만드는 ‘삼성과 LG의 나라’가 참으로 초라하게 여겨졌다.
또 거기에서 거의 항상 재정부족으로 존폐위기에 놓여있는 학교를 아둥바둥 지켜 나가느라 밤잠을 설치는 정 선생님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국학교 없이도 아무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곱고 늘 단정한 차림의 정 선생님께서 30년 넘는 그 긴 세월 동안 토요일마다 쉬지도 못하고 당신에게 재정적 도움이 되기는 커녕 학교 재정후원을 얻기 위해 주중에는 발품까지 팔아야 하는 그 생활을 왜 인내하시는지…
하지만 교장선생님과 함께 한 지난 8년의 세월 동안 나도 그의 마법에 걸려 언제부턴가 그 초라한 학교에 내가 재직했던 여느 학교들보다 더 애착을 갖게 되었다. 친분관계가 있는 한국 엄마들에겐 애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못하는데도 한국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그것은 거의 매국노 수준이라며 뼈있는 우스개 소리를 해가며 은근히 압력을 가하였고, 그중에 재력있는 집에는 사회적 책임감을 들이대면서 재정적 지원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정 교장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게 되면서 나는 내 자신이 교육자로서 이 땅의 교육현실을 고민하기 보다 기꺼이 도피하였으며 자신의 내팽겨쳐진 존엄성과 상처받은 자존심에 더 집착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한 편으로 생각하면 지독하게 융통성이 없는 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20여년의 교직생활 중 단 한번의 결근도 없었으며, 학교에 지장없도록 두번의 출산을 계획적으로 긴 겨울방학 동안에 했다. 또 동료 교사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교사 유니폼으로 큰 가운을 착용함으로써 임신 사실을 숨긴 결과 급기야 임신 8개월에 공개 수업을 하게 된 적도 있었단다. 교사가 노동자로서 권리보호를 위해 파업을 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머리를 내 저을 뿐이다.
자신의 일에 철두철미했던 작은 체구의 야무진 젊은 여교사를 여느 상사가 아끼고 신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정 교장선생님께서 전격적인 신임과 사랑을 받았던 것은 1975년 한국에서의 교직생활을 접고 영국행 비행기 탑승을 위해 기다리던 김포 공항에서 연출된 상황이 입증한다.
지금으로부터 33년전 해외여행이라는 말도 생소했던 시절,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향해 떠나가는 그를 배웅하기위해 당시 재직중이던 학교에서 여러 선생님을 비롯 교장선생님까지 나와 꾸버꾸벅 졸며 밤늦은 시간까지 연착된 비행기를 함께 기다려 주셨단다.
정 교장선생님은 영국에 와서 월급도, 진급도, 돌 볼 학생 수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채 한국인 2세의 한글교육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목표로 교육자로서의 전보다 훨씬 더 멀고 어려운 여정을 새로 시작하셨다. 가지 않았으면 더 편했을 길을 일부러 찾아 가신 것이다. 하지만 정 선생님께서 이 길을 택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한국인 2세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되찾았는가!
영국에서도 그는 참으로 성실하게, 그리고 경험과 연륜을 토대로 당신의 역할을 꾸준히 모범적으로 해 나가셨다. 정 교장선생님께서는 항상 학교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등교하는 선생님,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을 모두 반갑게 맞아 주시고, 어린 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학부모들과는 긴 세월 동안의 만남을 통해 자상한 어머니처럼 집안일도 의논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셨다. 또 선생님들과의 관계에선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일 없이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다.
벌써 여러해 전부터 고희를 넘긴 연세와 더불어 자유롭게 여행하며 친지들도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 사임의 뜻을 표했으나 여러 이사들과 선생들이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결국 오늘에야 정 교장선생님을 보내드리게 되었다.
주위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교직자의 신분이 땅에 떨어져도 정 선생님은 초지일관 성실한 교육자였고 천직으로서 교육자의 길을 걸으셨다. 스승이 죽었다는 이시대에 참된 스승님으로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다.
한국 사회와 여론이 교육자들을 돈봉투에 눈이 먼 미천한 직업인으로 몰고가든, 아무 때나 기분내키는 대로 학생을 체벌하는 인격미성숙자로 보든, 비정상적인 교육열로 인한 사교육의 홍수속에서 교사가 교육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상황에서든 결코 흔들리지 말자.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고 지식을 전수하는 선생님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스승님이 되도록 성실하게 이 길을 갈 것이다. 내 곁에 무급으로 봉사하는 교사들이 있고, 정 교장선생님같은 분이 계시는 한 이 땅에 스승은 살아있다.
교장선생님 부디 건강하셔서 한국학교때문에 못 다니셨던 여행 많이 다니세요.
2008 년 10월 정구선 교장선생님 퇴임식 날
후배 교사 김미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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