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제이 (Jay Chang) / 전 영국 <코리안위클리>, 미국 <타운뉴스> 발행인
현 WeCan Communications Inc. 대표
▲ “오랜만입니다.” 장 제이 씨 가족은 사진과 함께 독자 여러분의 안부를 전해왔다. “이 기회에 저희 부부를 기억하는 분들께 십년 만에 안부 전하며 그리운 여러 분들로부터 소식 기대합니다”라며 이메일주소를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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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굴레와 허욕이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질풍노도의 끓는 피는 분출구를 찾아 터질 듯 용솟고 있었다. 한계점이었다. 80년대 말의 어느 겨울, 난 며칠째 동경의 어느 다다미 여관방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다가올 내 인생을 저울질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다. 그간 내 삶을 얽어 매고 있던 아무 짝에 쓸데없고 거추장스런 굴레들을 단 한 방에 날려 버리기로. 위험한 음모였다. 그러나 무서울 것 없는 이십대 청춘 아닌가.
며칠 후 우린 런던 행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새처럼 훨훨 나는 꿈을 꾸면서.
두번째 찾은 런던. 여행지가 아닌 이제부턴 내 고향이란 생각이었다.
뼈속으로 스미는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사우스켄싱턴의 싸구려 호스텔에서 고향의 첫 밤을 지냈다. 그리고 소호와 시티에서 접시닦기 등 박박 기는 밑바닥 인생부터 체험했다. 그때만 해도 유학생 필수코스였다. 금요일 저녁이면 펍을 돌며 고주망태가 되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피카딜리 서커스 계단에 앉아 각국 처녀들의 엉덩이를 관찰하며 비평하던 일.
한번은 클라스메이트였던 어느 이탈리안 여학생의 예의상 한번 놀러 오라는 말에 후일 진짜로 알프스 산속마을 그녀 가족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 놀래주고 성 같은 그 집에서 며칠 묵고 온 일 같은 것이 지금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때 집시처럼 대륙을 헤매기도 했다. 여행기를 출판하기도 했고 어느 히피 커플에게서 산 폭스바겐 캠핑카로 한동안 다니다 팔고 본격적인 트럭마운트형 캐러반을 구입해 캐러버닝을 하다 아예 그 계통으로 나설 뻔 하기도 했다. 스탠모어에 단독주택을 얻어 살 때는 그레이트덴 종의 황소만한 애견 부루노를 기르며 연출한 온갖 코미디들도 생각나는 추억거리다. 물론 어느 때보다 역경도 많았고 고민 깊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십수년이 흐른 지금 런던 초창기와 관련된 기억들은 고생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아름다운 영화 한편, 정겨운 추억으로만 느껴질 뿐이니 이상하다. 그건 아마도 그때 음습하고 깊은 우물에서 밝은 벌판으로 튀어 나온 듯 숨가쁘게 좋았던 그 젊은 자유의 짜릿함이 너무도 강렬했었고 그 설레임이 런던 체류 내내 우리의 근저를 지배하고 있었던 때문이리라.
하여간 그런 런던생활 중에서도 역시 우리에게 가장 크고 보람된 일이라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첫 딸 브리타니를 낳은 일이고 또 하나는 영국 아니 아마도 유럽 최초의 한글 주간 신문일 <코리안위클리> 창간이다.
<위클리>의 탄생은 다분히 감상적이고 즉흥적 결심의 산물이었다. 친지의 이사짐 접시 사이에 꾸겨 넣어져온 한국신문을 펴서 맛있게 읽고 또 읽었다는 어느 교포 아저씨의 말이 문득 전기 자극처럼 뇌리를 파고 들며 글쟁이 전력과 끼에 발동을 걸었던 것이다. 노쓰하로우 월셋방 한켠에 작업실을 차리고 우여곡절 끝에 91년 초여름 무렵 창간호를 냈던 기억이다.
사실 신문이라 호하기엔 좀 낯간지러울 정도로 인쇄나 외형은 보잘 것 없었다. 인터넷이고 뭐고 없던 때고 요령 부족이었다. 장비라야 당시 런던대 박사과정이던 김종용 형(현 금감원 국장)이 연구실서 쓰다가 버리다시피 준, 타자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석기시대 컴퓨터 한대가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밤새워 직접 취재하고 쓰고 사진 찍고… 마감날이면 밤을 하얗게 새며 참으로 열심히 만들었다. 도배란게 뭔지도 모를때라 순진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맨땅에 헤딩 식으로 만들었다. 다음날 동네 마음씨 좋은 아지라는 인도인이 하던 인쇄소에서 찍어 스즈끼 깡통 찝에 싣고 템즈강을 넘나들며 런던시내에 돌리고 다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그런데 어랍쇼, 전혀 없다가 처음 그런게 나와선지 <위클리>를 받아든 한인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고국소식에 늘 굶주려 있었으니 당연했다. 업소광고가 넘쳐나 지면을 곧 늘려야 했고 주재상사들로부터도 굵직한 광고협찬을 받기 시작했다. 때로 마찰도 있었지만 대사관(당시 이홍구 대사), 한인단체들에서도 여러모로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중에도 잊을 수 없는 분은 당시 삼십년 넘게 런던교외에서 영국인 부인과 거주하시던 분으로 60년대 한국일보 논설위원도 하셨던 박중희 옹이다. 한때 <런던시보>란 잡지를 몇차례 내신 일도 있는 박선생님은 한동안 <코리안위클리>에 ‘청석정’이란 고정 칼럼을 써 주시기도 했다.
하여간 취미 반 시작한 일이 생각외로 광고수입도 짭짤해 곧 사무실도 근사하게 얻고 일하는 사람도 여럿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공연히 시기 질투하는 이들, 출처불명의 이런저런 소문도 떠돌았다니 그 역시 인기의 반증이었다.
한인사회 호응에 힘입어, 게으른 천성에도 불구하고 한 주도 안 거르고 아마 거의 100호까지 인가를 채웠던 것 같다. 물론 나와 달리 시간관념 철저하고 책임감 강한 집사람 도움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선천성 방랑끼의 주기적 발동인가? 런던생활에 자리와 틀이 잡혀 갈수록 어쩐지 내면에서는 반비례로 일상의 권태가 서서히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모처럼 한국을 다녀온 후 어느날 문득 나는 더 큰 세상을 넘보며 자꾸만 날아가려는 스스로를 결국 억제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어쩐지 여기보다 저 너머 잔디가 더 푸르러 보이는 건 그저 착시현상일 뿐임을 잘 알면서도.
결국 93년 여름, 우린 정든 런던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넜다. 끝없는 고향 만들기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무대를 옮겨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그간 동부(뉴욕 맨하튼)와 웨스트코스트(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두 군데 더 고향을 만들어 이미 추억 속에 파묻었고 이제는 미드웨스트의 미네소타주를 새 고향 삼아 어느새 6년째 살고 있다.
그러던 작년 어느날, 우린 십년 너머 소식을 모르던 자식의 소식을 우연히 듣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에서 힘들게 낳아 기르다 고향 떠나며 할 수 없이 남에게 주어버린 두살 박이 갓난아이가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성숙한 모습으로 자랐다는 소식이었다. 이름도 태어날 때 지어준 그대로 <코리안위클리>였다.
그간 맡아서 십년세월 훌륭하게 키워오신 분과도 연락을 하고 있다. 이번 600호 발간과 관련한 원고부탁을 받고 축하인사를 신세타령 비슷한, 두서 없는 이 글로 대체하며 아무쪼록 영국 최초의 한글신문 <코리안위클리>의 롱런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