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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롤모델 엘리자베스 1세
코리안위클리  2013/01/16, 07:29:57   
▲ 엘리자베스는 살아서도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 칭송된다. 영국인의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은 워낙 깊어 지금도 그녀에 관한 책이 끊임없이 나온다.

죽음 곁에서 배운 생존전략 三不二行

정복왕 윌리엄(1027~1087) 이후 1000년의 영국 역사에서 국민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군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58~1603)이다. 엘리자베스에 대한 영국인의 사랑은 그녀를 부르는 여러 가지 별명에서도 나타난다. 엘리자베스를 줄인 애칭 ‘베스(Bess)’, 좋은 여왕이라는 뜻의 ‘굿 퀸 베스(Good Queen Bess)’,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는 의미의 ‘처녀 여왕(Virgin Queen)’, 동화 속 여왕 같다는 ‘요정의 여왕(Fairy Queen)’ 등 다양하다. 여왕 자신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글로리아나(Gloriana)’라는 애칭으로 불리길 좋아했다. 어느 것 하나 싫어한다는 느낌을 주는 호칭은 없다. 영국인이 그만큼 그녀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엘리자베스는 살아서도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 칭송된다. 영국인의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은 워낙 깊어 지금도 그녀에 관한 책이 끊임없이 나온다. 그녀의 무엇이 그렇게 영국인을 매혹시키는지 모르지만 수도 없는 사람들이 연구하고 찾아냈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 책이 나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 내용이 그 내용 같은데도 불구하고 영국인은 새 책이 나오면 열심히 사본다.
하긴 영국 역사에서 헨리 8세로부터 에드워드 6세, 메리, 엘리자베스로 이어지는 100년(1509~1603)은 가장 흥미로운 사건이 많았다. 이 시기는 드라마나 영화로도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그런 드라마의 중심에도 항상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다. 그녀의 일생 자체가 워낙 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일생을 다룬 책에는 도저히 왕이 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고 미래를 준비하면서 살아 남았는가가 쓰여 있다. 그리고 그런 생존철학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여왕의 치세술로 나타나고 치세에 도움을 줬는지도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성군과 폭군 사이

엘리자베스에 관한 책들을 읽다 보면 그녀에 대한 평이 하도 저자마다 달라 전혀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폭군으로 평하는 책부터 성군으로 숭앙하는 책까지 정말 다양하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은 ‘신중하고(prudence)’ ‘용기있고(courageous)’ ‘영악스러운(shrewd)’ ‘타고난 지도자(born leader)’라는 단어들이다. 일단 그녀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 ‘신중하다’고 하는 표현은 ‘정치적으로 결코 단호하지 않았다(politically indecisive)’라고 바꿔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내각에서건 의회에서건 이해가 다른 세력 간의 대결이 팽팽해 결론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으로 결정을 내려달라”는 독촉을 아무리 받더라도 쉽게 개입하지 않았다. 어느 한편을 들기를 원하는 중신들의 의견을 듣기만 할 뿐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들 사이의 토론이 극에 달해 피가 튀는 지경까지 갔다가 결국 타협점을 찾고 합의를 만들어 내도록 유도했다. 수년간 이어지는 외국과의 갈등 때문에 전쟁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비겁하다고 느낄 정도로 끝까지 대결을 피하려 노력했다. 여론이 무르익어 결론이 보이거나 시간이 돼 저절로 합의가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정책이 잘못되어도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했다.
여왕은 대외문제에서도 주변의 극단론자들을 특유의 기지와 논리로 설득하며 이겨 나갔다. 전쟁처럼 국민에게 부담이 가는 일은 아무리 대의명분이 확실하다고 해도 가능하면 피했다. 예를 들면 유럽의 신교 국가들이 신성동맹을 만들자고 해도 시늉만 내고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결정마저도 자신이 내리지 않고 대신들로 하여금 대신 내리게 만들어 나중에 실패했을 때 오는 비난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신중한 여왕(prudent queen)’이라기보다는 ‘사려 깊은 정치가(thoughtful politician)’였다고 평한다.

“여론은 나의 편”

이런 책임회피식의 애매모호한 통치술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를 향한 국민의 호의적인 여론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여론을 자기 편으로 돌려 놓는 천부적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여왕은 당시 유럽의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국민 여론에 아주 민감했다. 그녀의 언니 메리 여왕 말기부터 권력의 추는 이미 엘리자베스에게 거의 넘어가 있었다. 메리 여왕이 죽고 그녀가 왕궁으로 가는 대로변이 “엘리자베스”를 외치는 런던 시민으로 꽉 찼을 정도로 엘리자베스에게 거는 국민의 기대는 컸다.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 여왕은 치세 기간 국민에게 부담이 돌아가는 정책은 삼갔다. 일단 세금을 올리지 않으려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전쟁을 하지 않았고 전비 모금이나 청년들의 동원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궁궐을 짓고 거대한 파티를 여는 데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아주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대다수 영국 국민의 입맛에 맞게 허황한 일을 피하고 실질적인 정책을 폈다.
피치 못해 전쟁을 치르더라도 세금 인상을 피하기 위해 거상(巨商)들에게 각종 전매특허를 주는 식으로 전쟁 자금을 충당했다. 그 바람에 물가가 올라 본의와는 달리 원성이 높아지자 의회에 나가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어려움을 정면 돌파했다. 1601년 11월 30일 여왕이 의회에서 행한 그 유명한 ‘골든 스피치’가 대표적이다. 이 자리에서 여왕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며 난국을 헤쳐 나갔다. 국민도 그녀가 세금 인상을 피하고자 했던 진의를 인정한 것이다.
영국 왕권이 유럽 군주에 비해 강한 이유에는 역설이 작용한다. 영국 왕들은 누구에게 위협을 줄 만한 대규모의 직할 군대를 가지지 않은, 어찌 보면 무방비 상태의 군주다. 영국의 중세 왕들은 경찰이나 군대를 가지고 통치하지 않았다. 영국에 경찰이 생긴 것은 18세기 중엽 들어서이다. 역사적으로 영국 왕은 직할군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왕궁 경비 병력도 지방 귀족들이 보내 주었다. 그 전통이 아직 남아 지금도 버킹엄궁은 향토연대 현역 군인이 와서 순차적으로 경비해 주고 돌아간다. 그것이 바로 매일 아침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버킹엄궁 앞 ‘근위병 교대식’이다.
이런 독특한 영국만의 제도가 왕들로 하여금 일찍부터 국민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고 국민의 대의기관인 의회와 타협, 협조를 해가며 국정을 펴나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영국이 혁명 없이 근대로 넘어오고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왕권을 유지하는 이유는 바로 왕이 군대를 안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강력한 군대를 가지면 왕권이 강화된다고 대부분의 군주들은 믿지만 영국 역사는 그것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강력한 군대를 가진 군주는 거기에 의지해 통치를 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선을 넘어서 국민과 충돌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약한 왕권, 약한 군대, 여론 존중의 영국 정치제도가 역설적으로 영국과 영국 왕권을 튼튼하게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됐다. 부드러움과 약함이 어느 것보다 강하다는 실증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三不二行
듣되 말하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고 친구를 많이 만들고


‘만들어진 지도자’

엘리자베스가 통치 기간 동안 보여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고 ‘타고난 지도자’라고 평하지만 사실은 오랜 기간 살아 남기 위해 택한 생존전략을 통해 ‘만들어진 지도자(made leader)’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그녀의 좌우명이 그 유명한 ‘보되 말하지 않는다(Video et taceo)’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세 살 생일도 맞기 전에 생모인 앤 볼린이 남편인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당하는 걸 봤다. 자신은 공주에서 사생아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재위에 오른 25세 때까지 엘리자베스의 매일은 생사를 넘나드는 살얼음판이었다. 그 속에서 그녀의 지상과제는 오로지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기간 동안 누구도 그녀의 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생존전략은 삼불이행(三不二行·three do not and two do)이었다. ‘듣되 말하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의 ‘삼불’과 ‘조용히 지내고, 친구를 많이 만들고’의 ‘이행’이었다. 그렇게 죽은 듯이 몸을 낮추고 살았음에도 메리 여왕에게 위협이 되니 죽이라는 중신들의 모함과 음모로 거의 1년여의 가택연금과 공개재판까지 받았다.
그녀의 이런 경험과 생존철학은 통치 스타일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자신이 약할 때는 물론 강할 때도 자신을 낮추고 비바람이 그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다. “인내와 시간이 힘과 분노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는 여왕의 말이 자신의 철학을 말해 준다. 부드러움이 결코 나약함이 아니고 양보와 타협이 진정한 패배가 아니라는 지혜를 그녀는 신산(辛酸)의 시절을 통해 배웠다.
사실 여왕은 조상들로부터 탄탄한 권력을 이어받아 철권통치의 유혹에 빠질 만도 했다. 여왕의 할아버지였던 헨리 7세 시절 30년간(1455~1485)이나 이어졌던 장미전쟁을 거치며 영국 국민은 강력한 왕권을 원하고 있었다. 헨리 7세는 적이었던 랭커셔 가문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두 철천지 원수 가문의 화해를 극적으로 이루어내며 강력한 왕권의 기반을 다졌다. 당시 영국 귀족들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거의 폐족 지경이었다. 가신 기사들은 죽었고 가산은 전비로 탕진해 왕권에 감히 도전할 귀족도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안정된 왕권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통치철학인 ‘안정(stability)’과 ‘일치(concord)’를 실천하며 결코 독주하지 않았고 의회나 귀족을 상대로 대결을 벌인 적도 없었다.

의회와 상인의 마음을 잡다

엘리자베스의 권력 유지의 근간은 여론 중시뿐만 아니라 당시 양대 권력집단인 의회와 시티 상인들을 존중하고 무시하지 않았다는 데도 있었다. 이런 정책으로 돈줄인 런던시티(City of London) 상인들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받았고 정치적으로는 의회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런던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도시’를 효과적으로 다 장악한 셈이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공이 임박하자 그녀는 런던시티 시장(Mayor of City·지금의 런던 시장이 아니라 2.6㎢ 크기의 자치구역인 ‘시티’ 상인조합장)을 궁으로 불러들여 협조를 부탁했다.
당시 영국은 군대라고 해 봐야 지방 귀족의 농군이나 좀 있을 뿐이었고 제대로 된 해군은 전혀 없을 때였다. 당시 여왕은 시티 측에 15척의 선박과 5000명의 군대를 요청했으나 오히려 시티 측은 상선 30척과 1만명의 군대를 제공했을 정도로 자발적 충성을 표시했다. 전국 지방 귀족들의 지원도 쇄도했다. 엘리자베스의 군대가 전쟁 경험이 없는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것을 전적으로 운이라고만 볼 수 없다. 여왕의 리더십을 따르는 국민의 충성심이 있었기 때문에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녀는 영악했다

‘신중하고 사려 깊다’는 것 외에 여왕의 또 다른 품성으로 ‘영악스럽다’는 점도 강조된다. 이는 상황에 맞추어 원칙을 굽힐 줄 아는 것, 즉 ‘현실적으로 지혜롭다’로 얘기할 수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언니 메리가 여왕이 되자 엘리자베스는 신변의 위험을 감지한다. 메리가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만들려 한다는 점을 재빨리 파악한 것이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엘리자베스는 바로 언니에게 자신도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눈물로 호소하고 살아 남았다. 언니 메리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위장 개종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그녀는 어느 경우든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진정한 생각을 숨겼다. 항상 자신의 의견을 모호하게 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들었다. 자신들 편에 서 있다고 양쪽의 사람들이 다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것마저도 확신을 주지 않아 여왕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한 충성 경쟁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임기응변을 발휘해 양쪽의 비위를 맞추는 모순된 발언도 쉽게 했다. 필요하면 즉석 거짓말도 능수능란하게 했다. 외국 사신에게 자신이 직접 관련된 사건을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기도 했다. 후에 그것이 들통 나면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와 감성적인 접근으로 누구든 친구로 만들었다. 정 안 될 경우에는 선물을 주며 매수하기도 했다. 서인도제도에서 은을 싣고 오는 스페인 선대를 약탈하는 해적 드레이크함대에 돈을 대고 그 보상으로 무려 47배에 달하는 배당을 받고도, 태연히 스페인 대사에게는 우방의 배를 약탈하는 해적 행위를 규탄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생모에 대한 기억도 전혀 할 수 없던 나이부터 25세에 여왕이 되기 전까지 누구도 믿지 못하고 살아 온 그녀에게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런 정도의 행동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대 정치인 뺨치는 여론조작

그녀가 국민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을 보면 현대의 대중 정치인 기법을 뺨칠 정도다. 권위와 위엄과 무력으로 통치하던 당시 유럽 군주들과는 달리 엘리자베스는 국민을 상대로 놀라운 친화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메리 여왕의 실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메리는 군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개인적인 연정에 휩싸여 국민 염원에 반하면서까지 스페인 필립 왕자와 결혼했고 가톨릭 복귀에 집착하며 실정을 펼치다 결국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이 과정을 냉정하게 지켜보면서 국민 여론과 유리된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배웠다. 자신의 권력 기반이 국민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국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시민들과 의도적으로 어울렸고 실제로 이를 즐기는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예컨대 여왕은 복잡한 시장통으로 마차를 몰고 가서 일어선 채 시민들을 맞기를 즐겼다. 시민들이 “폐하 만수무강”을 외치면 그녀는 “주님이시여 시민에게 만복을 내리소서”라고 성공회의 수장답게 그들을 축복했다. 교회에 가도 잘 받을 수 없던 축복을 삼엄한 경호나 의전을 다 팽개친 군주가 자신들 지근에 와서 내려주니 시민들은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 순찰 때는 관리들을 아낌없이 칭찬했고 사전에 수하를 보내 혹시 그 도시 시민들이 가장 염원하는 민원이 있는지 알아봐 현장에서 해결해 주는 고도의 정치술도 발휘했다. 심지어 지방 귀족 집에 초대받아 가면 그 집 안주인의 요리 솜씨 칭찬을 반드시 했고 종복에게까지 감사나 선물을 전했다.
여왕의 이런 행동은 오랫동안 그늘진 곳에서 살아온 경험에서 우러난 것들이다. 자신을 죽이고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온 오랜 세월 동안 터득한 생존전략이라 할 수 있다. 여왕은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최고임을 경험으로 깨우쳤다. 사람들의 마음은 아주 큰 보상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사나 칭찬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에 누군가가 베풀어 준 아주 작은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크게 와 닿았는지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궁중에서 떠받들어지는 삶만을 산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지혜라 할 수 있다. 왕이 되기 전 겪은 오랜 생활의 어려움은 이렇게 축복으로 돌아왔다.

만인의 연인으로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은 노처녀를 동화 ‘잠자는 공주’ 속에 나오는 ‘물레 돌리는 마녀(spinster)’라고 부를 정도로 독신을 금기시한 시대에 공식적으로 “처녀로 살겠다”고 주장한 첫 여인이었다. 그녀 입으로 “나는 국가와 결혼했고 내 남편은 모든 국민이다”라고 했다. 그녀가 독신을 주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비극적 결말로 끝난 부모의 결혼과 남자에 대한 염증,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인 토머스 세이모어(아버지 헨리 8세의 마지막 부인인 캐서린 파의 새 남편이기도 함)에게 성추행당한 어릴 때 경험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심지어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자신은 불임이라고 믿어 후사 없는 결혼으로 ‘처녀 여왕’이라는 명성을 훼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여왕은 한 사람의 여인이 아니라 베일 속 영원한 만인의 여인으로 남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 스스로 관능적 욕망을 항상 극복할 수 있음을 자랑으로 여겼고 한 사람에게 빠지지 않고 초연함을 견지할 수 있음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던 듯하다. 동시에 스페인 왕자 필립과의 경솔한 결혼으로 인기가 추락한 언니의 사례, 한 가문의 남자와 결혼함으로 해서 남편의 가문을 반대하는 다른 가문을 적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고려도 있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녀가 의회나 여론을 거스른 유일한 경우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의회와 중신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강력한 남편의 후원이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특히 그녀가 천연두로 인해 잠시 투병을 하고 일어나자 결혼을 하든지 후계자를 지명하라며 견딜 수 없는 압력을 가했다. 여기서도 엘리자베스의 지연 전술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의회의 압력에 “가능하면 빨리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수없이 하지만 그후의 행동을 보면 애초에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여왕에게는 미혼이 오히려 정치적 자산이었다.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문전에 쇄도하는 유럽 왕가의 남자들과 영국 내 귀족들을 적절히 이용해 국익을 취했다. 항상 주위에 자신을 흠모하는 미남 귀족들을 두고 그들의 시선을 즐기면서 경쟁을 시켰다. 때로는 상당한 수준의 언질을 주고 그것을 미끼로 실속을 취한 뒤 어느 단계에서는 과감하게 내치는 고도의 정치술도 발휘했다. 오랫동안 유럽 양대 가문인 합스부르크와 벨로아 가문의 신랑감 후보들을 가지고 놀면서 그들의 세력균형을 이용해 영국의 국익을 극대화했다. 모든 구혼자들에게 교태를 부리며 결혼의 희망을 보여주면서 이용만 하고는 목적을 이루면 배신을 밥 먹듯 했다. 그녀에게는 권력 유지와 국익이 최우선이었지 결혼은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남자들을 이용했다

그녀의 치세 성공의 원인 중 또 하나는 중신들을 잘 쓴 데 있다. 측근을 택할 때 당시 관례와는 달리 가문보다 능력 위주로 뽑았다. 중산층·자작농·상인 계급을 아랑곳하지 않고 실력 있는 사람을 택했다. 정치가로서보다는 행정가로서의 자질, 애국심, 국가 이익에 대한 관심에 중점을 두었다, 일단 임명하면 믿고 일을 오래 맡겼다.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있는 그녀의 무덤과 가장 근접한 곳에 묻힌 최고의 중신 윌리엄 세실 경은 귀족이 아닌 소지주(yeoman) 출신이다. 엘리자베스의 대관식부터 자신이 죽는 날까지 40년을 각종 직위에서 봉직했다. 유럽 역사 첫 ‘스파이 마스터(스파이 총책)’로 드라마에 많이 등장하는 프랜시스 월싱햄도 유명한 여왕의 가신이다. 17년을 봉직하면서 여왕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정적을 제압하는 등 엘리자베스의 통치에 큰 도움을 주었다. 여왕의 능력은 남자들을 잘 파악해 그들을 적절하게 이용했다는 데 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서 가장 잘 교육받은 여인이었다.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를 비롯해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영국 지방언어인 스코티시, 코니시, 웰시, 아이리시까지 구사했다. 왕마저 문맹이 있을 정도였던 당시로서는 엘리자베스의 유식함은 특이한 일이었다.
‘역사는 유탄이 만든다’고 한다. 역사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의 결과라는 말이다.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된 것은 우연이다. 왕위계승 순위 세 번째라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몸이 약했던 남동생 에드워드 6세가 6년을 통치하고 죽은 뒤 즉위한 언니 메리 여왕마저도 겨우 5년을 재위하고 죽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여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던 시절에도 부단히 자신을 갈고닦아 군주로의 자질을 연마했고, 결국 영국 역사상 가장 유식하고 위대한 왕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의 리더십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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