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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타이틀의 대가로 비싼 짐을 질 준비가 돼 있나
코리안위클리  2014/10/01, 06:24:03   
▲ 힐스버러 참사가 터진 후 25년이 지났지만 영국 사회는 아직도 생생히 그날을 기억한다. 지난 4월 13일 런던 웸블리 구장에서 열린 FA컵 4강전에서는 희생자 96명을 위한 빈자리에 리버풀의 머플러를 걸어두고 경기를 치렀다. 경기 전 관중들이 묵념하는 모습.

런던에서 본 한국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에서 국격(國格)이란 말이 유행한 때가 있었다. 오래전에 유행했던 국위(國威·國位)라는 단어의 형제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용도가 전혀 다르고 국위보다는 한 수 높은 단어다. 국위는 ‘국위 선양’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히 국가의 ‘위세(威勢)’를 높이는 데 치중되어 힘의 과시만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나, 국격은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 듯하다. 영어로는 ‘national prestige’가 국격에 해당하고, ‘national status’가 국위일 듯한데 영어권 언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단어들이다. 아마 그들에게 국격은 이미 다 이루어 놓은 것이라서 굳이 국격 제고니 국위 선양을 외칠 필요도, 논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너무 진부해져서 쓰기도 민망한 ‘선진국’이란 단어를 ‘국격이 제고된 국가’라고 보고, 그런 국가는 어떤 국가인지 평가 기준을 한번 살펴보자.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유엔의 ‘세계 각국 행복지수’ 기준을 원용해 보자. 행복도조사 기준으로는 국가총생산, 수명, 사회적 지원(social support), 부패 인식도, 삶의 선택권(freedom to make life choices) 등을 비롯해 통치(governance)의 질, 교육, 건강, 환경친화, 개인의 시간 사용, 문화 다양성, 사회 역동성, 정신적 건강, 삶의 질 같은 갖가지 요인이 다 사용되었다. ‘삶의 질’ 항목만 해도 ‘재산, 주택, 각 가정의 수입’ 등의 세부 항목이 있다. ‘사회 역동성’ 항목에는 ‘기부(금액·시간), 공동체 연관, 가족관계, 안전’이 들어 있다. 이런 다양한 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을 이룬 국가라면 선진국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유엔 행복도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행복도 상위 10위권 국가들은 캐나다(6위)와 오스트레일리아(10위)를 빼고 나면 덴마크를 선두로 노르웨이, 스위스,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 아이슬란드 순으로 모두 유럽 국가, 그것도 대다수가 북유럽 국가다. 그 다음은 미국(17위), 아일랜드(18위), 룩셈부르크(19위), 벨기에(21위), 영국(22위), 프랑스(25위), 독일(26위) 등의 구미국가가 차지한다. 30위 중 무려 17개가 구미국가다. 행복 순은 역시 선진국 순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참고로 한국은 55위로, 43위인 일본보다 낮고, 93위인 중국보다는 높았다.

유럽 일류국가들이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해도 정부 통치의 질이나 사회의 부패 정도 말고도 이것저것 따지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문화수준, 인권보호, 해외원조, 자선제도, 법질서, 사회청렴도를 중요시한다. 올림픽을 다른 나라보다 더 성공적으로 주최하고 금메달을 몇 개 땄는지, 축구 월드컵 순위가 몇 등인지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초호화판 건물이나 입이 딱 벌어지는 대형 공장보다는 차라리 고아원 시설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를 더 중시한다. 인권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법 체계가 얼마나 잘 되어 있어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지 않는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처우가 어떤지, 정치적 망명을 구하러 오는 제3국인들을 어떻게 잘 보호하는지, 문화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가 더 중요하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싱가포르처럼 길거리에 걸인 없고 휴지 없는 것도 사회가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방증이라는 판단이 나온다. 노숙자는 경제가 나빠서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 문제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다.

유럽인 사이에서도 일류, 이류, 삼류 국가 등급 근거가 있다. 우선 ‘부패’에서 출발해 보면 자신들이 일류라고 생각하는 유럽 국가들에서는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의 부패를 찾아보기 힘들다. 일류 유럽 국가에서는 공무원 독직이나 정치인 부정 같은 보도는 드물다. 영국의 경우 2009년 텔레그라프신문의 특종으로 시작된 영국 의회의원들의 경비 부정 사용이 거의 유일한 돈과 관련된 부정이었을 정도다. 이것도 그전부터 관행으로 오랫동안 행해지던 것들이 세상이 바뀌면서 문제가 되었다. 금액도 수십만원부터 수천만원이 가장 큰 금액이라 어찌 보면 웃음이 나올 법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몇몇 의원은 현재 형을 살고 있고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인 경우도 있다.

거기에 비하면 이탈리아는 공무원과 정치인의 부정이 대단한 수준이다. 또 마피아와 관련한 사회적 부정이나 기업의 조세포탈은 다른 유럽 국가가 고개를 흔들 정도다. 사회 공정성도 문제이다. 다른 삼류 유럽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국가들은 아직도 사회적으로 공정한 룰이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외국 기업이 들어가서 사업을 할 때는 알게 모르게 차별하고 외국인을 다룰 때도 자국민과는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고 처우한다. 노동허가를 비롯해 사업허가를 받으려면 이들 나라에서는 머리가 다 빠질 정도라고 한국 기업인들은 비명을 지른다.

‘사회적 지원’을 살펴보자. 영국인은 재해나 남에게 받은 부당한 취급을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 손으로 해결한다. 난관에 부딪혀도 굴하지 않고 정말 놀라울 정도로 꾸준하게 오랫동안 열기를 식히지 않고 추진해서 진실을 밝혀 낸다. 본인이나 주위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부정한 일에 의해 희생이 될 때는 분연히 나서서 조직을 만드는 데 앞장선다. 뒤에 앉아서 불평불만만 하면서 세상을 한탄하지도 않는다. 혹은 굳이 내가 안 나서더라도 누군가가 하겠지 하는 ‘나 몰라’ 식의 방관자는 더욱 아니다. 영국인은 일반적으로 이런 시민운동을 접하면 적극 나서서 호응을 잘 해준다. 기꺼이 자신이 직접 참여를 하거나 개인사정상 못하면 기금이라도 내고 심정적 도움을 준다.

영국인은 이렇게 자신의 권리는 참여해서 쟁취하는 것이고 방관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여긴다. 영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진상규명 운동을 해서 진실을 밝혀 낸 힐스버러축구장 압사사건이 대표적이다. 1989년 리버풀과 노팅엄포레스트 축구팀 간 영국축구협회배 준결승전에서 경찰의 판단착오로 96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을 리버풀 팬들의 난동 때문에 생긴 일로 경찰이 덮었다. 이를 리버풀 팬의 유가족과 클럽 팬들이 일치단결해 무려 23년간을 투쟁해서 진실을 밝혀내고야 말았다. 최종 보고서를 2012년에 냈다. 정권이 보수당, 노동당, 다시 보수당으로 세 번이 바뀌도록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진실규명을 이어갔다. 30년이 되어야 공개하는 정부의 문서공개 규정을 10년이나 당겨 80개 기관으로부터 45만쪽의 문서를 받아내 결국 396쪽의 보고서를 독립적인 조사기관이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이 사건을 다룬 주간조선 기사를 본 한 독자의 댓글이 인상적이었다. 이 독자는 ‘이런 전통은 냉혈인간인 영국인들 혹은 유럽인들에게만 있는 건 아닌지?’라고 썼다.)

이런 사례는 이외에도 수도 없이 많다. 영국인의 이런 시민정신은 자신이 부당한 취급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들이 이런 경우를 겪게 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책무에서도 비롯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영국인이 택하는 방법은 정말 독자의 댓글처럼 냉철하고 현실적이다. 감정에 휩쓸려 결코 거리로 몰려 나가지도 않고 자신을 해치는 단식을 택하지도 않는다. 엄격히 정상적 경로를 밟아서 차근차근 여론을 몰아가는 방법을 택한다. 제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극단의 방법을 택하기 마련인데, 영국에는 정상적인 해결 방법이 수도 없이 많다. 자신의 지역구 의회의원을 통해서 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 혹은 자신이 속한 정당을 통하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영국인에게는 한이 없다. 부당한 취급을 받거나 불공정한 일을 당하면 어딘가에 가서 하소연하고 해결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유엔 행복도 보고서의 조사 항목인 ‘사회적 지원’에 해당하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영국에서 이런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활동을 먹고사는 일과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에는 이런 자선단체들을 감독하는 기관(Charity Commission)이 있다. 개인들로부터 받은 기부금이나 회비 등은 물론 각종 경비 지불 등을 제대로 보고해야 자선단체 등록을 유지할 수 있다. 만일 부정한 사용이 발각되면 공금횡령으로 형을 살게 된다.
또 영국의 시민운동은 정치와 연관돼 있지 않다. 정치인이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정치인도 근처에 가서 점수를 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언제나 민간활동으로 남아 있고 그렇게 해서 순수한 활동이 오염되지 않도록 사회가 감시한다. 이런 사회구성원 각자의 노력이 합쳐져서 ‘한이 없는 사회’를 만든 것이고, 이것이 영국을 상위권 행복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제 ‘통치의 질’을 보자. 영국 사회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이 어디서나 지켜지고 있다. 특히 의회에서 소수 야당이 할 일은 표결 전에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다수당의 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을 끌어내 저지하는 것이다. 영국은 여당 의원이 행정부의 장관을 맡는 내각책임제여서, 여당과 정부가 결심하면 야당이 막을 방법이 별로 없다. 그러나 야당이라고 그냥 손 놓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맹렬하게 반대하고 저지를 위해 노력한다. 각계 각층을 상대로 공청회도 열고 언론을 통해 여당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한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표결로 들어가면 다수결의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 의회 일정으로 넘어간다. 표결로 통과된 정책의 성공 여부로 다음 선거에서 승부를 내겠다는 뜻이다. 만일 야당의 여론 몰이가 성공해서 궁지에 몰린 여당이 가끔 자유표결을 자당 소속 의원들에게 허용해 정부 정책이 부결되는 경우도 있다. 작년 여름의 데이비드 캐머런 정부의 시리아 파병 여부가 의회에서 285 대 257로 부결된 것이 그중 하나다. 연합 정부를 구성하는 보수당의 의석 수가 305석, 자민당이 56석이니 전체 여당표 361표 중 무려 104표가 이탈했다는 뜻이다. 캐머런 총리의 지도력 논란이 한참 있었고 위기라는 설이 분분했다. 그래도 국정은 문제없이 돌아갔다. 감정으로 한풀이를 하기 위한 장외투쟁이 국민들의 지지나 가시적 성과를 못 거둘 것을 알면서도 장외로 쏟아져 나가는 일은 최소한 영국 정치에서는 볼 수 없다.

▲영국은 여당 의원이 행정부의 장관을 맡는 내각책임제여서, 여당과 정부가 결심하면 야당이 막을 방법이 별로 없다. 그러나 야당이라고 그냥 손 놓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각계 각층을 상대로 공청회도 열고 언론을 통해 여당 정책을 비판하고 맹렬하게 반대하며 저지를 위해 노력한다.

▲영국은 여당 의원이 행정부의 장관을 맡는 내각책임제여서, 여당과 정부가 결심하면 야당이 막을 방법이 별로 없다. 그러나 야당이라고 그냥 손 놓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각계 각층을 상대로 공청회도 열고 언론을 통해 여당 정책을 비판하고 맹렬하게 반대하며 저지를 위해 노력한다.

 
영국인은 한국전쟁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영국군은 연인원 6만3000명이 참전해 1109명이 전사했고 2674명이 부상했다. 한국이 어딘지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나라의 명령만 받고 달려와 꽃다운 청춘을 바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한국을 향해 혈맹을 강조하며 교역상의 이득을 취하려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유럽 국가 중 가장 늦게 북한과 수교했다. 프랑스처럼 자신의 국익을 위해 북한 카드를 쓴 적도 없다. 영국은 한국과의 수교 역사상 한 번도 한국에 특혜를 요구한 일도 없다. 영국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룰을 적용한다. 자신들이 누구에게 특혜를 요구하지도 않고 누구에게 특혜를 주지도 않는다. 즉 혈맹이라는 응석을 자신들도 부리지 않고 받아주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한때 한국은 외국과 통상협상을 하면서 한국이 분단국가여서 국방력 부담이 많고 혈맹국임을 강조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고 한 적이 많았다. 응석을 부렸다는 뜻이다. 영국은 유치원생에게도 교복을 입히고 넥타이를 매게 한다. 특히 사립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부를 때도 반드시 ‘젠틀맨’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존중해 준다. 가정에서도 자식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되 동시에 응석을 받아주지 않고 엄격한 책임을 묻는다. 이런 사례는 영국 사회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결코 규칙에 어긋나는 특혜를 영국 사회는 누가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고 또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다. 영국은 원칙을 어기고 상황에 따라 응석을 받아주는 사회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공정한 룰을 가지고 경쟁해야 함을 영국 사회 일원들 누구나 알고 거기에 따른다. 아무리 참혹한 사고를 당해도 모든 이에게 같은 규정이 적용되어야 한다. 천재지변을 당했다고 정부가 농부들에게 보상해 주는 특혜는 당연히 없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도 없다. 차라리 목소리가 크면 진다.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차근차근 따지면 훨씬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자국 작가 살만 루시디를 보호하는 걸 보면 영국의 원칙 고수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1989년 작품 ‘악마의 시’에서 무슬림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당시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는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루시디를 죽이라고 하며 현상금 300만달러를 내놨다. 이런 살해 위협에 영국 정부는 매년 100만파운드를 들여 루시디의 신변 보호를 했다. 지난 25년간 영국 정부는 2500만파운드(450억원)의 국민 세금을 여기에 지출했다. 인권보호와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영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은 어떤 희생과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고 이러한 실례를 통해 이를 지켜왔다.

영국이 아닌 유럽 선진국의 사례 하나를 더 들어보자. 덴마크 신문 율란 포스텐이 2005년 시한폭탄을 머리에 장착한 터번을 쓴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그린 만평을 연재한 사건으로 덴마크가 혼란에 빠졌던 적이 있다. 덴마크 무슬림을 비롯한 세계의 무슬림이 이를 무함마드에 대한 신성모독이라며 맹렬히 반발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가 자국의 덴마크 주재 대사를 소환했고 리비아는 대사관을 폐쇄했다. 알제리, 바레인, 요르단, 쿠웨이트, 모로코, 카타르 같은 무슬림 국가들이 덴마크 유제품의 불매운동을 벌였다. EU(유럽연합)는 불매운동을 벌이는 모든 국가를 불공정 무역을 이유로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덴마크 법정은 덴마크 무슬림 종단의 고소로 시작된 재판에서 표현의 자유는 공공의 이익에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만평이 범죄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고 끝을 맺었다. 워낙 유럽 전체가 강력하게 나가자 무슬림들도 더 이상의 확전은 바라지 않았는지 조용해지고 말았다.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친러시아 반군에 의해 격추되어 자국민이 154명이나 사망했을 때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딸 마리아가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데, 푸틴에 대한 비등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사회는 마리아에 대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성숙함을 보여줬다. 시골 마을 시장 한 명이 마리아를 네덜란드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현명한 발언이 아니었다”고 바로 뒷걸음 치게 만든 것은 역시 네덜란드 국민의 성숙한 여론였다. 이른바 ‘브레이빅 사건’이 벌어진 노르웨이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을 망원총으로 조준 사격하는 등 하루에 76명을 살해한 참사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사회는 슬픔과 격분으로 마비되지 않았다. 조사 결론도 나기 전에 당장 어떤 조치를 요구하면서 사회를 마비시키지도 않았다. 성숙한 여론으로 무장한 나라들은 결코 쉽게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다.

유럽 각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정치적 망명객이나 난민들에 대한 배려는 세금을 내는 유럽 각국의 납세자 입장에서는 정말 화가 날 만한 일이다.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유로 망명을 신청하는 난민들이 워낙 많아, 그 적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보통 3~4년이 걸린다. 그동안 유럽 각국 정부는 주택과 생활비를 전부 지불해야 한다. 싫어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국제적 여론은 고사하고 유럽 내에서부터 먼저 비난의 화살이 돌아온다.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유럽 각국 사이에서는 존경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선진 유럽인은 자신들만이 잘살고 풍족하게 산다고 절대 존경하지 않는다. 한반도의 이웃 중국·일본·러시아가 국력에 비해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부담은 선진국이 짊어져야 할 짐이자 영광이다. 이렇게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달프고 비싸고 힘들다. 과연 한국이 이런 고달프고 비싼 짐을 질 준비나 각오가 되어 있는지가 궁금하다.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 저서로는 '영국인 재발견(안나푸르나)'.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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