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마라토너’ 손기정씨 타계, 90 평생 끊임없던 마라톤 사랑
15일 새벽 타계한 손기정(90)씨는 달리기 하나로 조국을 빼앗긴 식민지 동포들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준 ‘영웅’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이기 이전에 한평생을 체육인으로 살아온 체육계의 큰별이기도 했다.
1912년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났고, 16살 때 중국 단둥의 회사에 취직한 뒤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한 일화는 유명하다. 20살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만학의 길을 걸으면서 마라톤을 시작했다. 35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최종예선을 겸한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해 올림픽 대표로 뽑혔다.
일본 대표로 올림픽에 나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참가 여부를 고민했지만, 꼭 1등을 해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보여주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이듬해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리고 2시간29분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해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손씨는 훗날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서 “내 우승의 표시로 막상 일장기가 올라갈 때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고 당시의 참혹했던 심정을 회상했다.
선수생활 뒤엔 후계자 양성에 나섰으며, 사재를 털어 서윤복(47년)과 함기용(50년)씨 같은 세계적인 선수를 직접 키우기도 했다. 47년 당시 대표팀 감독을 맡은 손씨는 언더우드 박사 등에게 2천여 달러를 빌려 서윤복 남승룡 선수 등을 데리고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했다. 서씨는 당시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손씨의 기대에 부응했고, 3년 뒤에는 다시 함기용·송길윤·최윤철씨 등이 이 대회에 참가해 1~3위를 휩쓸며 ‘마라톤 한국’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한은 92년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씨가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쓰면서 비로소 풀 수 있었다. 손옹이 월계관을 쓴 56년 후 같은 날인 8월9일 황영조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다. 그 날 손옹은 1위로 결승선에 들어온 뒤 기진해 운동장에 쓰러진 황영조의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며 울음을 삼켰다. 손옹은 그 감격을 이렇게 썼다. ‘태극무늬를 가슴에 단 선수가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두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손옹의 화제는 최근까지도 한국마라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황영조 이봉주까지는 괜찮은데 다음이 없단 말야. 난 배가 고파서 못 뛰었지 배만 부르면 반드시 1등을 했어.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야. 조금만 배가 부르면 안 하려 한단 말이야. 1등 해본 사람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1등을 할 수 있는 법인데….”
48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시작으로 63년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65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한국선수단장, 63년부터 85년까지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맡아 한국 체육발전을 위해 이바지해왔다.
98년 다리에 동맥경화 증세를 보이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뒤 2000년부터는 치매증세가 찾아왔고 신부전증을 비롯한 각종 합병증 때문에 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정신이 또렷할 때면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한 이봉주씨와 바르셀로나올림픽의 영웅 황영조씨 등 후배들의 근황을 물어볼 정도로 마라톤에 대한 사랑은 잊지 않았다고 한다.
손씨는 이런 공로로 57년 대한체육상, 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고, 별세 뒤엔 정부가 체육훈장 청룡장을 추서했다.
그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얘기 끝마다 “그 맛있는 신의주 냉면 한번 먹어 봤으면 원이 없겠어.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은 근처에도 못간다고. 내가 그 힘으로 뛰었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제 그의 넋은 육신을 떠났다. 지금쯤 그의 넋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 신의주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