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프랑스의 국민투표에서 유럽헌법이 큰 표차로 부결된 것으로 내무부 부분 개표와 조사기관의 출구조사에서 나타났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국영 TV 연설에서 국민투표가 부결됐다고 시인했다. 내무부는 85%를 개표한 결과 반대 55.96%, 찬성 44.04%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프랑스에서 유럽 헌법이 부결됨에 따라 25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향후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유럽 헌법은 회원국 모두의 비준을 받아야 발효되도록 규정돼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부결되는 순간 유럽 헌법은 정치적으로 ‘소멸’될 위기에 처한 셈이다.
하지만 EU 각국 지도자들은 프랑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유럽 헌법은 살아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30일 다른 회원국의 비준절차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스페인·이탈리아·독일 등 9개 나라에서 EU 전체 인구의 절반인 2억2천만명이 승인한 만큼 한 나라의 반대로 무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유럽 헌법에는 모든 회원국의 비준이 있어야 발효된다고 돼 있을 뿐, 특정 회원국이 비준을 거부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절차가 규정돼 있지 않다. 다만 헌법 부속선언에 헌법서명 2년 뒤 1개국 또는 몇몇 나라에서 비준에 어려움을 겪을 경우 유럽정상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EU 지도자들은 다른 나라에서 예정된 비준절차를 거친 다음 민감한 내용을 삭제하거나 완화하는 수정안을 마련해 부결된 나라에서 다시 투표를 통해 비준절차를 밟는 방안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지금의 유럽 헌법을 비준한 국가와 수정된 헌법을 비준한 국가가 공존하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프랑스에 이어 비준을 거부하는 회원국이 늘어나면 어떤 방안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어 유럽 헌법은 소멸될 공산이 있다. 당장 1일로 예정된 네덜란드 투표에서도 반대의견이 우세한 상황이어서 ‘부결 도미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헌법이 소멸된다고 해서 기존의 EU 체제가 무너지거나 지금까지의 유럽통합 노력이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유럽 헌법이 없더라도 유럽통합의 근간이 돼 온 니스조약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다만 ‘유럽합중국’을 지향하는 EU의 정치적 통합작업은 큰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또 유럽통합에 관한 회의론이 확산되면서 경제적 타격도 피할 수 없다. 서부 발칸반도와 터키·우크라이나 등으로 팽창하려던 EU 움직임에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유럽 정상들은 16~17일로 예정된 정례 유럽이사회에서 유럽통합의 속도 조절을 포함한 대책을 심도있게 논의할 계획이다.
경향신문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