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리라. 자녀교육을 통하여 기대하는 바가 흔히 말하는 성공이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적당한 부와 건강과 명예를 얻으면 되는 것인가? 그 성공은 마음에 평안과 성취의 기쁨과 만족감을 주는 것인가? 죽음에 이르러도 두려움이나 아쉬움이 없이 만족함과 기쁨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가? 미지의 두려움이 아닌 영원한 기쁨으로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절차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는 성공인가?
그러한 기대감은 망상인가? 인간에게 부족함과 아쉬움, 아직 충족되지 못한 소원이 있다면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사망이라는 인생의 과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해결책을 모르면서 생이란 그렇게 마감된다고 믿으면 되는 것인가? 해탈했다는 듯이 모든 소망을 포기하면서, 두려운 이별, 고독과 미지의 고통을 내포한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 성숙한 인생의 길인가? 종말이 이른 것 같다는 소리들이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지금까지도 해 아래에는 묘책이 없다. 날마다 죽음과 고독과 미지의 어두움과 끈질긴 아쉬움과 여러가지 연약함과 무지와 질병의 문제들을 해결 받지 못한 채, 언제 이 생이 끝날런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이 삶은 마치 수천길 낭떠러지로 다가가는 배를 타고 가면서도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가운데 죽음에 이르고 있는 것을 잊은 사람들과 흡사하다.
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과정은 어떠했는가?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인간교육 과정과 목표는 무엇인가?
1. 겸손하고 온유한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그는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 짐승의 구유 즉 먹이통에 뉘임으로 사람 중에 가장 소박하고 낮은 자리에 있었다. 참되고 위대한 인간이 되는 데에는 외적인 출생의 환경이 문제 되지 않는다. 처녀로서 수태고지를 수용했던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약혼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해야했던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난했지만 겸허하고 온순한 부모 아래서 자라난 점은 금수저의 부와 오만함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환경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인간이란 참으로 놀라운 잠재력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걸작품을 겸허하게 관찰하지 못한 채 무지함과 욕심으로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문제이다. 강제하는 교육으로 인해 아이들은 기쁨을 잃게되고 공부할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온유하게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평안이 확보될 때에 아이들은 자유를 느끼며 속에 있던 자원이 반응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에디슨의 어머니처럼 이미 그들에게 있는 천재성이 발현되도록 사랑을 부어주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다. 그것은 놀라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아이를 부탁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2. 소통하는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자라났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2).
그는 푸른 가지를 의미하는 나사렛에서 자라났다. 그 자신이 푸른 나무라고 하셨듯이 (눅 23:31) 그는 진정 살아 있는 참 사람, 나사렛 사람이었다 (마 2:23). 이사야 선지자가 그를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날 한 가지라고 불렀는데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נצר)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 11:1)- 한 ‘가지’ 라는 낱말이 히브리어 내쩨르이며, 나사렛(나쯔랏)이란 말의 뿌리이다. 나사렛은 이렇다 할 것이 없는, 200여명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반문했던 곳이다. 물론 유명한 요나 선지자가 나사렛 인근 가드헤벨 출신이었다. 예수는 예루살렘 같이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들이 있던 나라의 중심이 아닌 시골에서 자라나셨다. 과거 송나라의 그 ‘강남’ 같은 화려한 교육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사렛은 살아있는 푸른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있는 곳이었다. 서로를 확인하며 소통하기에 어렵지 않은, 사람다운 감성과 윤리적 자정능력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다양한 정보지식을 얻기에는 부족했겠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삶의 추이를 볼 수 있어, 삶을 통찰하며 지혜를 얻는 데에는 좋은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이웃에게 선하게 응답하며 소통하는 나사렛 사람으로 자라난 것이다. 응답하지 않는 관계는 얼마나 힘이드는가? 통하면 살고 막히면 죽는 법이다. 실력있고 똑똑한 사람들은 적지 않으나 진실하고 평안하며 지혜롭고 잘 소통하는 사랑스러운 자들은 얼마나 되겠는가?
3.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났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눅 2:51).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여 고향에 왔을 때 사람들은 그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임과 어머니와 동생들의 이름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나사렛에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고향 사람들은 그를 목수의 아들이라며 무시한다. 그의 성장기에는 주목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목수일은 공간감각을 비롯한 다양한 감각을 익히기에 좋은 직업이다. 건축가로서 역할을 수행하려면 10년 정도의 숙련과정이 요구된다. 의학이나 신학수업과 비슷한 기간이다. 건축은 문화예술의 다양한 분과에서도 앞서가는 안목을 자극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그의 성장교육의 특징은 순종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메시야가 된다. 피흘려 죽지 않는다면 죄인의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 어느 단체이든 순종하는 자를 원한다. 창의적이고 지혜로운 자를 환영하지만 오만방자한 자를 원치는 않는다. 지혜로우면서도 공동체의 질서에 순응하며 유익을 주는 겸손하고 건전한 인간상을 원한다. 사회의 문제는 결국 가정의 문제이며 가정에서 훈련되어야 할 덕목은 무엇보다 억압이 아닌 순종이다. 결국 순종의 교육은 부모의 책임과 관련이 깊다.
4. 하나님을 아는 교육이었다.
그는 12세에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라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자녀들의 성년식에 해당하는 바르 미츠바는 12~13세에 이뤄진다. 이 때부터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권리와 회의 의사 결정권을 가지며 이 때에 경제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기본 자산을 마련해 준다. 독립된 인격으로 세워지는 성년의식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시기에 인간이 가르쳐 줄 수 없는 최고의 지식을 얻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기의 출처 즉 아버지이심을 알게된 것이다.
아이들은 말할 나위없고 어른이 되어도 부모를 찾고 고향을 찾는다. 부모와 고향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은 외롭고 쓸쓸하다. 영적인 고아와 같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인생은 얼마나 외로운가? 인간은 스스로 완전하지 못하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이 궁극적인 자기의 아버지이심을 인식한다는 것이야 말로 참된 지혜요 진정한 의미에서 성숙한 자가 되는 것이다.
나가는 말
위대한 것은 소박한 것이라고 했던 맥아더의 말이 기억된다. 소박하고 평범하게 보이는 우리의 환경은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이다. 소박하게 보이는 우리 삶의 주변에는 건강에 필요한 값진 보화들이 널려 있고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실재는 이미 우리의 마음과 입에까지 다가와 있다. 그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그 ‘큰 구원’이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안하며 영원한 삶을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누리는 사람으로 키우시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교육이다.
전계상 목사
옥스포드선교교회 담임
ⓒ 코리안위클리(http://www.koweekly.co.uk),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