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이기적인 선택이 선사하는 가장 고귀한 자유, ‘자기 해방’의 원리
용서라는 이름의 ‘가시 면류관’
우리는 흔히 ‘용서’를 고귀한 미덕이자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로 배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나를 배신한 동료, 공동체를 깨뜨린 이간질,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가해자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머리로는 용서를 되뇌지만 가슴속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분노의 돌덩이가 박혀 숨을 쉴 수 없게 만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지점에서 ‘착한 그리스도인 콤플렉스’에 빠집니다.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적 강박은 오히려 분노를 내면으로 억누르는 독이 되어 결국 깊은 우울과 자기혐오로 번지곤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나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인가?”라는 자책은 가해자가 준 상처보다 더 깊게 우리 영혼을 짓누릅니다.
“나는 용서를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직 용서하지 못한 너에게’라는 책을 집필하며 저는 끊임없이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용서를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서 동료의 배신으로 실패를 뒤집어썼을 때, 저는 기도실에서 무릎을 꿇는 대신 밤마다 그를 향한 복수심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목회자가 된 이후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신뢰했던 청년의 오해로 공동체가 갈라졌을 때, 제 안에는 축복 기도 대신 지독한 ‘쓴 뿌리’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 책은 고상한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용서에 서툰 제가 스스로를 향해 던졌던 처절한 성찰에 대한 기록입니다. 특히 영국 유학 중인 청년들을 목회하며, 좁은 한인 공동체라는 ‘고립된 섬’에서 도망갈 곳 없이 상처를 마주해야 하는 이들의 고통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서 과거 분노를 억압했던 제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용서의 본질은 죄책감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바로 ‘나의 생존’과 ‘해방’에 있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의 재정립: 가해자가 아닌 ‘나’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
제가 발견한 첫 번째 전환점은 용서가 남을 위한 숙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가해자에게 베푸는 은혜나, 반드시 관계를 복구해야 하는 의무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내 삶의 통제권을 내어주는 어리석은 짓을 멈추는 것입니다.
미움과 복수심은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매일 아침 가해자를 떠올리며 분노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 사람을 내 마음의 가장 상석에 ‘주인’으로 모셔두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는 그 복수심의 사슬을 끊고, 도둑맞았던 나의 감정적 에너지를 회수하여 나의 미래를 위해 사용하는 가장 이기적인 해방 선언입니다.
경계 설정: 사랑의 반대가 아닌 ‘사랑의 프레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서 경계를 긋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Agape)’ 사랑은 뜨거운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 선택’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 의지적인 기도를 하되, 나를 파괴하는 관계로부터는 단호히 거리를 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 역시 수많은 무리의 요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새벽 미명’에 고독한 거리를 두셨고, 바리새인들의 독설 앞에서는 묵묵히 입을 닫으셨습니다. 이처럼 건강한 경계(Boundary)를 설정하는 것은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토대입니다.
● 용서(Forgiveness): 내면에서 복수심을 내려놓는 주체적 행위 (가해자의 상태와 무관함).
● 화해(Reconciliation): 관계를 재정립하는 쌍방적 행위 (가해자의 진심 어린 회개가 전제됨).
● 용납(Acceptance): 가해자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 (필요하지 않음).
용서했더라도 가해자가 변화하지 않았다면, 관계를 단절할 자유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치유의 실천: 분노를 인정하고 홀로 회복하기
용서의 여정은 ‘분노를 허락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정당한 상처에 대한 분노는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보여주신 의로운 분노처럼, 우리 안의 분노는 정의가 훼손되었다는 건강한 신호입니다. 이 분노를 억압하지 말고 ‘분노 일기’를 통해 날것 그대로 쏟아내십시오. 종이가 찢어질 듯 꾹꾹 눌러 쓰며 당신의 상처를 인정할 때 비로소 감정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가해자의 사과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사과를 기다리는 것은 당신의 평안에 대한 열쇠를 가해자에게 맡겨두는 것과 같습니다. 가해자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복수심의 에너지를 자기 계발의 동력으로 바꾸고, 기도의 내용을 ‘가해자를 향한 축복’과 함께 ‘나의 평안을 지키는 보호’로 바꿔야 합니다.
나가는 말: 상처가 등불이 되는 새로운 시작
저는 이 책을 마무리 지으며 창밖의 작은 풀꽃을 보았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아닌, 지금 눈앞에 살아있는 생명의 몸짓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었던 그 고요한 찰나가 바로 ‘평안’이었습니다.
당신의 상처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짓누르는 짐이 아닙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길어 올린 그 위로는, 이제 다른 상처 입은 영혼들을 비추는 가장 강력한 희망의 자원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먼저 평안해질 때, 그 빛은 세상을 향해 가장 아름다운 선한 영향력으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이제 그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은 자유로울 자격이 있으며, 지혜롭게 자신을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그리고 당신의 평안을 온 마음을 다해 축복합니다.
박상도 목사
셰필드한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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