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의 ‘새로운 복음’과 나무 십자가
2022년 11월 30일. 그날 세상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치 밤눈이 쌓이듯 고요하게 그 축을 옮겼다. 캘리포니아의 한 기업이 ‘ChatGPT’라는 기이한 창조물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처음엔 그것이 기술의 바다에서 일어난 작은 포말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차가운 알고리즘이 인간의 언어를 입고 속삭이기 시작하자 세상은 경악했다. 사용자 1억 명을 모으는 데 고작 두 달, 정복자의 진군과도 같았던 이 거대한 파동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인류의 영혼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 소용돌이의 목격자였다. 어느 늦은 밤, 평생을 바쳐 묵상해 온 단어인 “기독교 신앙에서 은혜(Grace)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 인공지능에게 물었다. 답변은 고작 3초 만에 돌아왔다. 그 문장은 신학 석사 논문의 결론처럼 정교했고, 수십 년간 강단에서 외쳤던 나의 설교보다 분명했다. 경이로움 뒤에 찾아온 것은 심장을 찌르는 듯한 서늘한 두려움이었다. 기계가 3초 만에 쏟아내는 정보의 폭포 앞에서, 우리는 혹시 가장 본질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솟구쳤다.
손끝의 전능함이 가져온 고립의 파라독스
돌이켜보면 이 변화는 2007년 ‘아이폰’이라는 작은 유리 조각을 치켜들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우리는 주머니 속에 슈퍼컴퓨터를 넣고 무한한 지식의 바다에 접속한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그러나 그 신비는 무서운 속도로 ‘당연함’의 자리를 꿰찼고, 이제 스마트폰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존의 필수품이 되었다.
현대인은 하루 평균 150번 넘게 스마트폰을 확인한다고 한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6분마다 한 번씩 차갑게 빛나는 사각형 화면 속에 영혼을 매어두는 셈이다. 우리는 ‘손끝의 전능함’을 소유하게 되었다. 길을 잃으면 위성을 믿고, 외로움이 밀려오면 SNS 가상 세계의 박수를 구걸한다. 모든 욕구가 즉각 해소되는 이 효율적인 세상을 실리콘 밸리는 ‘새로운 복음’이라 선포한다. 하지만 우리는 빛의 속도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고립 속에 박제되어 가고 있다.
목양의 길을 걷다 보면 성도들의 눈동자에서 깊은 피로와 고독을 읽게 된다. 그들은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박식하지만, 그 지식의 성채 아래 영혼은 마른 논바닥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다. 과거 낡고 묵직한 주석서를 넘기며 정답 주변에 흩어진 신앙 선배들의 고뇌를 마주하던 시절, 그 ‘느린 걸음’은 하나님과 함께 거니는 거룩한 산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3초 만에 원하는 정보만 낚아채고 창을 닫아버린다. ‘우연한 은혜’와 깊은 침잠의 공간은 사라지고, 지식의 표면만 스쳐지나는 ‘정보의 홍수 속 지혜의 가뭄’이 시작된 것이다.
알고리즘의 감옥, 확증 편향이라는 비늘
우리의 일상은 이제 알고리즘이 직조한 정교한 거미줄 속에 갇혀 있다. 유튜브와 SNS는 내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대령한다. 보이지 않는 종복(從僕)이 내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오니 편리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함정이다. 알고리즘은 결코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동의하는 것, 내 생각의 틀을 공고히 해줄 것들만 보여 주는 사이, 우리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 속에 갇힌 눈 먼 자가 되어간다.
비극적이게도 우리의 신앙조차 이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각자의 취향에 맞는 설교만 골라 듣다 보니 신앙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진리의 균형은 무너진다. 성경은 이미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12)고 경고하셨다.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이 알고리즘이 빚어낸 환영일 수 있다는 의심을 잊어버린 채, 오직 내 목소리의 메아리만 듣다가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마를수록 들이키는 소금물, 영혼의 기갈
우리는 왜 이토록 고단한가?. 1초마다 업데이트되는 피드의 홍수 속에서 감각이 난도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는 과열된 기계처럼 돌아가고 생각은 파편이 되어 흩어진다. 2003년 런던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시절, 육체는 고달팠으나 삶이 단순했기에 누렸던 그 깊은 평안은 이제 전설처럼 멀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우물가에서 매일 물동이를 내리지만, 그 물은 마실수록 갈증을 유발하는 소금물과 같다. 정보는 넘쳐나나 배부르지 않고, 수천 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은 스마트폰의 불빛이 꺼지는 순간 시린 고독으로 변한다. 데이터의 나열은 우리 존재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으며, 정교한 알고리즘은 상처 입은 영혼을 어루만질 수 없다. 성 어거스티누스의 고백처럼,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 위의 복음, 나무 십자가의 진실
실리콘 밸리의 선지자들은 빠르고 쉬운 지식과 무한한 연결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들은 지식을 감당할 지혜도, 연결을 유지할 사랑의 근육도 주지 못한다. 반면 수천 년을 뚫고 살아 숨 쉬는 진짜 복음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나사렛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더 최신의 정보를 약속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를 소란스러운 질주로부터 멈춰 세우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말씀하신다.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거룩한 안식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고리즘의 최적화된 경로가 아니라, 비효율적이고 느리더라도 주체적인 영적 결단을 통해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편리함이라는 우상에게 바쳐 버렸던 거룩한 유산들, 즉 연산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영성의 신비와 인격 사이의 따스한 사귐을 회복해야 한다.
당신의 영혼은 지금 무엇에 갈급해하고 있는가? 알고리즘이 약속한 차가운 유토피아가 아닌, 생명이 약동하는 그 좁고도 영광스러운 길로의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 밤은 깊었으나 새벽을 향한 갈망은 뜨거워진다. 셰필드의 작은 서재에서 차가운 화면의 불빛을 끄고 비로소 마주하게 될 영원한 빛을 향해, 나는 이제 첫 발자국을 내딛는다.
박상도 목사
셰필드한인교회 담임
ⓒ 코리안위클리(http://www.koweekly.co.uk),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