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지난달 11일 신문. 현직검사의 ‘수사받는 법’ 기사에 대해 검찰총장을 비롯해 검찰조직이 “사전 협의없는 부적절한 신문 기고”라며 중단을 요구하고 나서 갈등이 빚어졌다. 아래는 문제가 제기된 기고글의 전문이다.
갑자기 수사기관에 체포되거나 소환 통보를 받으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이럴 땐 법에 보장된 피의자의 권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큰 도움이 된다. <한겨레>는 억울한 처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현직 검사의 조언을 매주 월요일 연재한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제대로 형벌을 가하는 것 못지않게 법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국민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인 금태섭(39) 검사는 사시 34회로 현재 서울중앙지검 형사부에서 일하고 있다.
‘수사받는 법’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
처음 동료 검사들에게 수사를 받는 법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말했을 때의 반응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자가 미쳤나하는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런 걸 다 가르쳐주면 앞으로 수사를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한 친한 검사로부터는 반 농담조로 “조직에서 추방당하고 싶냐?”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수사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나 변했다. 변호사를 동반하지 않은 피의자를 상대로 밤새도록 똑같은 질문을 해서 자백을 받는 시대는 지났다. 교통사고를 가장해서 피의자의 집 대문을 열게 한 것을 무용담으로 자랑하는 것도 그만두어야 한다. 검찰이 그런 방식으로 수사를 해서도 안 되고 여론의 지탄을 받는 범죄라고 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상을 밝히라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언론보도도 이제는 접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사를 포기하고 범죄를 방치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수사기관과 피의자, 피해자 또는 참고인 등 형사절차의 참여자들이 공정한 게임(fair game)을 통하여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그리고 그러한 체계를 갖추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수사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이 피의자의 권리를 정확히 알려주는 것도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피의자들은 법에 규정된 정당한 권리를 잘 모르거나 또는 잘 알면서도 혹시나 그런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담당 판사나 검사, 경찰관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을까 걱정해서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진술거부권을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수사과정에서 진술을 거부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수사기관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증거를 수집하고 사건을 해결해 왔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임기응변적인 수사를 계속할 수는 없다. 먼저 사건 관계인들이 법률에 따른 권리를 잘 알고 두려움 없이 행사한다면 그러한 상황을 전제로 수사기관도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수사방법을 고안해내게 될 것이다. 필요한 경우에는 법률의 개정을 통해서 실체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무기를 달라는 요청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범죄자가 법망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쓴 것이 아니다. 계좌추적을 피하는 법, 완벽하게 증거를 인멸하는 법, 시시각각 좁혀져 오는 체포를 피하는 방법과 같은 것은 여기에 소개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수사기관이 사용하는 흥미진진한(!) 수사기법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단지 현행법상 피의자 또는 사건 관계인들에게 인정되는 권리의 행사방법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이러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라고 권유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수사기관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피의자의 권리를 설명하는 글을 쓴 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주위의 여러 가지 상당한 근거 있는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제는 우리의 형사절차도 보다 선진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불가피하게 수사를 받게 되는 국민들도 과학적이고 투명한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약자의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는 피의자에게 알아서 권리를 행사해 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수사에 있어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다가가서 설명을 해주고 안심시켜주는 것이 순서에 맞는 것이고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이 우리의 수사 관행을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것이 되게 하고 품격 있고 공정한 수사기법을 정착시키는데 일조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피의자로서 수사를 받을 때의 대처방안
수사기관에 입건되어 피의자가 된 때의 곤혹스러움은 경험자가 아니면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도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기까지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는다. 심지어 오랫동안 판사, 검사, 변호사로 활동하던 법률가나 수사가 직업인 경찰관도 피의자가 되면 불안에 떤다. 그리고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다 보면 누구나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피의자가 수사에 대처하기 힘들어하고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수동적으로 수사를 받는 피의자는 약자의 처지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민주적인 사법제도를 갖춘 나라에서도 피의자와 수사기관이 실질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견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약자인 피의자가 반드시 지켜야할 행동지침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억울함을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설사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유리한 점을 찾아내서 수사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파멸로 이끄는 길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수사에는 밀행성의 원칙이 있어서 진행 상황을 비밀로 하게 되어 있다. 공개가 원칙인 재판과는 달리 수사를 받는 피의자는 충분한 정보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상처를 입는다. 가만히 있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더구나 수사기관에는 피의자에게 유리한 사실까지 찾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어떤 검사도 무고한 피의자를 기소했다가 무죄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는 것만은 피하라.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도 수사에 대응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칙은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이다. 검사나 경찰관은 수사에 있어서 프로라고 할 수 있다. 아마추어가 프로와 싸워서 이기려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병에 걸렸을 때는 의사를 찾아가면서도 수사를 받을 때는 스스로 무언가 해보려고 한다.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다. 의사도 아플 때면 다른 의사를 찾아간다. 자신의 운명이 걸린 승부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변호인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데는 금전적인 부담이 따른다. 그러나 직업적인 범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수사를 받는 것은 일생에 몇 번 없는 일이다. 중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야 한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훌륭한 변호인을 구해야 한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경우에도 국선 변호인 제도를 이용하는 등 다른 방법이 있다. 변호인을 이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이후에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한겨레
------------------------------------------------------------------------------------------ ‘검찰 변화 알리겠다’ 한 검사의 좌절
검찰이 변하는 모습을 알리겠다는 취지로 <한겨레>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 연재를 시작한 금태섭 서울중앙지검 검사가 갑자기 글쓰기를 중단했다. 10회를 작정하고 시작했으나 딱 한번 쓰곤 뜻을 굽힌 것이다. 본인은 ‘상부 지시나 압력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하지만, 검찰은 첫번째 글이 나간 지난달 11일부터 그를 궁지로 몰았다. 검찰 내부가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고, 기고를 중단하라는 회유도 집요했다고 한다. 검찰은 그에 대한 징계 여부까지 검토 중이다. 금 검사를 둘러싼 이런 소동은 검찰이 여전히 변화를 거부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검찰이 금 검사의 글에 이렇게까지 요란스럽게 반응하는 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그의 첫번째 글은 ‘검찰 수사를 받게 되면 직접 해결하려 하지 말고 전문가인 변호사에게 맡겨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하지만 일반인이 간과하기 쉬운 대목을 짚어준, 그야말로 상식적인 글이다. 이 정도의 글을 가지고 배신자라도 되는 양 비판하는 검사들을 보자니, 한심한 생각이 절로 든다. 시중에 떠도는 ‘검사스럽다’는 말만큼 딱 떨어지는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조직에 민감한 글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썼다는 비판도 설득력이 없다. 그는 직무에서 얻은 대단한 비밀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헌법 등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을 다뤘을 뿐이다.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알리는 것도 상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검찰이 과연 인권을 수호하는 기관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번 일은 검찰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금 검사가 신문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그렇고, 논란 과정에서 비록 극소수일지라도 금 검사를 옹호한 검사들이 있었다는 것이 또한 희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