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전시를 통해 외국인들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지도의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할까’ 고민하다가 백자 달항아리를 떠올렸습니다.”
오는 9월 세계 3대 박물관인 런던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에서 열리는 ‘달항아리전’을 기획하고 있는 지나 하-골린(한국명 하정심) 씨의 말이다. 그는 현재 영국박물관에서 근무하는 유일한 한국인 큐레이터다. 영국박물관 뿐 아니라 빅토리아앤앨버트뮤지엄, 내셔널갤러리 등 영국의 주요 국립박물관에 큐레이터로서 근무하는 한국인은 하씨 뿐이다.
“백자 달항아리가 전시공간의 중심에 놓이게 될 거예요. 물리적 공간의 중앙뿐 아니라 사고의 중심에도 놓이게 되는 거지요. 한국의 백자 달항아리를 미적인 관점과 함께 일본 도자기 문화에 끼친 영향 같은 것도 종합적인 시각에서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9월12일부터 추석을 전후한 시기에 약 2개월 간 열리는 전시회의 준비를 위해 잠시 서울에 들른 하씨는 지난달 이미 박영숙 작가의 달항아리를 런던에서 영국박물관 소장용으로 구입했다. 전시회에는 한국.중국.일본의 도자기에 심취했던 영국의 도자기 연구가 버나드 리치(Leach)가 일제시대 서울의 골동품상에서 사 갔다가 지금은 영국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달항아리도 전시된다. 달항아리가 들어가 있는 고 김환기 화백의 그림도 선보인다.
“달항아리는 도공이 100개를 구워내면 거기서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는 것은 2개 정도밖에 안된다고 해요. 나머지는 깨버리죠. 그래서 전시기간 중에는 잘 구워지지 않은 항아리를 깨는 그런 퍼포먼스도 하려고 합니다”
“2005년에 인스파이어(Inspire) 펠로십 프로그램이라는 게 생겼어요. 영국 국민 중 소수민족 비중이 38%나 되는데 소수민족의 시각을 반영하는 미술전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성이 일면서 생긴 거지요. 큐레이터 중에 소수민족 출신이 거의 없었던 겁니다. 영국박물관, 빅토리아앤앨버트뮤지엄, 내셔널갤러리,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테이트모던 등 다섯 곳에서 일할 큐레이터 5명을 뽑았는데 영국박물관 근무자로 제가 선정됐습니다.”
영국박물관에는 지역이나 테마별로 수많은 큐레이터가 있지만 이들 중에서 자신의 주도 아래 박물관에서 특별전시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더구나 1974년생인 하씨 같은 ‘어린’ 큐레이터에게는 보통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영국박물관에서는 50세가 안 된 사람은 ‘젊은’ 큐레이터에 속한다.
무려 150여 명이 응모한 인스파이어 큐레이터 모집과정에서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사람으로는 하씨 혼자만 선발됐다.
“바로 직전에 런던시장실 산하 문화정책단 멤버로서 런던시의 문화전략 수립에 자문역할을 1년 간 했어요. 그 전에는 영국왕실건축가협회에서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인턴을 하면서 전국 순회전시회 기획을 했어요. 또 빅토리아앤앨버트뮤지엄과 함께 소수민족 관람객을 뮤지엄에 끌어들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참여하면서 큐레이터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런 이력만 보면 그가 런던에서 오래 산 것 같지만 실제로 하씨가 영국에 온 건 6년 전인 2001년 3월. 맨체스터대학교에서 방문교수를 하던 아버지(하종률 동아대학교 대학원장)를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만나 결혼하게 된 세르지 골린 씨와 그 때부터 런던에서 함께 살았다.
“처음에 영국 문화의 깊은 곳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느꼈어요. 외국인이 우리 보릿고개라는 말을 배경을 잘 모르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남편이 많이 도와준 덕분에 적응이 빨랐습니다.”
그의 남편은 세계핵협회(WNA)에서 분석가로 일하고 있으며 언어가 전공이다. 골린 씨가 쓴 ‘핵영어(Nuclear English)’는 핵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방법을 다룬 책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다.
향후 계획에 대한 질문에 하씨는 “유럽 중심의 사관을 갖고 있는 기존의 영국박물관 큐레이터들에게 새로운 해석법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 인스파이어 펠로십 프로그램의 목적입니다. 그 취지에 맞게 달항아리전을 잘 꾸며 볼 생각입니다.”라며 자신있게 얘기한다.
그는 서울 체류기간 중 전시회와 관련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박영숙 백자 작가와 사진작가, 공연단체 관계자 등을 만난 후 18일 영국으로 돌아간다.
하씨는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건축공학을, 이어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이론과 비평을 공부한 후 런던의 킹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디자인 큐레이팅을 전공했다. 현재 영국박물관 아시아국 소속인 그는 영어 외에 한국어.일본어.중국어를 잘 하고 유럽 나라들의 언어에 대한 이해도 높은 것이 자신이 영국박물관 큐레이터로 선정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