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검사, 우리가 처음 대면한 것은 2년이채 안되었지요. 그때 당신은 지금처럼 강력부검사였고 나는 그대가 그토록 집착을 갖고 수사 중이던 범죄 피의자의 변호인이었습니다.
당시 수사검사와 변호인으로 마주하면서 사건을 대하는 그대와 나의 시각 사이에는 쉽게 넘을 수 없는 넓은 간극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두 번째 청구한 영장마저 기각된 그날, 밤 늦게라도 피의자를 상대로 계속 보완수사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조사실에서 피의자를 데리고 나오는 나에게 당신은 이렇게 반문하였지요. “변호사님, 피의자들이 지금 거짓말하는 것을 변호사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반드시 피의자들의 죄를 밝혀 내겠습니다.” 왜 꼭 그런 사람들을 위해 변론하고 덮어주느냐는 투의 힐난으로 당신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내가 과민한 탓이었을까요? 다소 타협조의 내 변론을 가로막으며 유독 유죄의 확신을 강조하는 그대의 단호한 음성에서 범죄와 쉽게 화해하지 않는 분노의 숨가쁜 호흡을 느꼈습니다. 그때 나는 그대의 불타는 정의감과 넘치는 의욕이 때론 독선과 오만의 독 묻은 칼날이 되어 자신을 벨 수도 있음을 차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밤샘 조사에 구타라니요. 거기에 물고문이라니요. 법률가의 비극이요, 수치입니다. 처음엔 내 눈과 귀를 의심하며 사실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행여 당신이 집요하게 추적한 살인사건의 실체적 진실공개를 앞두고 순간적으로 공명심에 눈먼 나머지 목전에서 자행된 또 다른 범죄를 짐짓 외면한 것은 아닙니까? 자백을 통한 수사의 효율성과 그 유혹앞에서 인권옹호라는 당신의 또 다른 중대한 사명감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조폭범죄를 수사하는 데 어느 정도의 폭력은 괜찮다는 식의 방편론에 기대어 법률가의 생명인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요?
나는 범죄와의 타협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히려 형벌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서도 서릿발같이 차갑고 냉정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검사시절 하도 뻔뻔하게 구는 피의자가 있어 수사 도중 귀싸대기 한번 올려 부쳤는데 시원하더라. 그런데 그때문이었는지 공판 구형에서 마음이 약해져 형을 깎아 주게 되더라. 그러나 증거로 꼼짝 못하게 기소한 피고인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구형하였다”는 어느 선배 법조인의 얘기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대목입니다.
법률가는 인간이 본래 이기적이고 나약한 존재라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수사기관의 추궁에 피의자가 변명하고 거짓말하는 것은 이런 인간의 본능적인 영역에 속하는,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강요나 협박·고문 등은 물론, 심지어 약속이나 회유 등을 이용한 증거수집은 인간성을 파멸시키는 범죄행위에 해당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우라’는 칸트의 철저한 법치국가관을 그대와 내가 공명하듯, ‘하늘이 무너져도 인권은 옹호해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아울러 강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 있는 자를 빠짐없이 벌하는 적극적 진실주의 못지않게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가두는 것은 죄악’이라는 소극적 진실주의 또한 결코 잊어서는 안될 법률가의 책무입니다. 이것이 과학수사, 증거수사를 요구하는 당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다른 능력과 끈질긴 집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그만큼의 결함 또한 지닌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집스러울 정도의 순수한 정의감, 10년 가까운 검사생활에서 한 달에 열흘도 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에 매달린 헌신과 봉사, 당신 가정의 희생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먼저 안타까움과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이 자칫 국가 형벌권에 희생되는 무고한 시민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절절한 심경으로 이런 의견을 드리는 것을 양해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