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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쓰고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의 모습 ⓒ ILOVESTAGE IMAGE LIBRA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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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슬립 노 모어> 서울 진출
‘배우와 관객이 한 공간에 존재하며 감정과 서사를 실시간으로 공유한다’는 정의로 공연을 배워 온 이들에게 객석이 사라지고 관객이 배우 옆에서 서랍을 뒤지고 편지를 읽는 이머시브(immersive) 공연은 낯설다.
체험·전시·게임·관광이 뒤섞인 이 하이브리드 형식이 과연 전통적 의미의 ‘공연’인지, 혹은 완전히 다른 문화 상품인지에 대한 논쟁은 20년째 계속되고 있다. 2024년 발표된 ‘이머시브 오디언스 리포트’는 몰입형 체험이 영국 내 전통 공연보다 젊고 다양한 관객을 끌어모은다고 밝혔지만, 동시에 관객이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시하는 요인이 ‘가성비’와 ‘친구와의 공동 체험’임을 밝혔다. 즉 이머시브 공연은 예술로서의 깊이와 테마파크형 오락으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요구받는 애매한 경계에 서 있다.
이 딜레마를 품은 채, 영국 펀치 드렁크 극단의 <슬립 노 모어 Sleep No More>가 2025년 7월 서울에 진출한다. 원작은 2003년 런던 외곽 폐교에서 소규모 실험으로 태어났지만, 2011년 뉴욕 첼시의 10,000㎡ 폐창고를 ‘맥키트릭 호텔’이라는 어둡고 관능적인 미로로 개조하며 세계적 열풍을 일으켰다. 관객은 흰 가면을 쓰고 세 시간 동안 말을 할 수 없으며, 배우를 따라다니든 소품을 뒤지든 매번 다른 단서만 얻는다. 이 ‘결핍의 미학’은 반복 관람 욕구를 자극해 일부 팬을 30~50회 이상 공연장으로 불러들였고, 2024년 막을 내릴 때까지 150만 명을 동원했다.
중국 상하이판은 2016년 개막 후 건물 동선을 간소화하고 캐릭터 일부를 현지 정서에 맞게 재해석해, Z세대 데이트 명소이자 SNS 인증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티켓 가격을 ‘고급 레스토랑 한 끼’ 수준으로 포지셔닝하면서도 객석 점유율 85%를 유지했고, ‘스토리를 이해하라’ 대신 ‘느낌을 소비하라’는 메시지로 흥행을 이어 갔다. 이 성공 방정식을 서울에 그대로 이식할 수 있을까?
한국의 공연 시장은 초연만 지나면 곧 블로그·유튜브·커뮤니티·공식 티켓 판매사이트에 줄거리와 배우 동선, 1:1 이벤트 사진이 퍼지는 초고속 ‘스포일러 순환’ 리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관객의 다수는 결말을 미리 알고 가거나, 1~2회 관람으로 플롯을 완전히 해석하고 싶어 하며, ‘누가 왜 죽었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정리한다. 이런 성향은 ‘스스로 퍼즐을 찾아야 완성되는 공연’인 Sleep No More와 정면 충돌한다.
더구나 국내 공연 티켓 소비는 가성비·SNS 화제성·빠른 정보 공유가 핵심인데, 반복 관람이 필수인 작품은 초기 호기심이 한꺼번에 소진되는 순간 급격히 수요가 꺾일 위험이 있다. 배우 입장에서도, 자신이 등장하는 1:1 씬이 관객마다 다르게 배정될 때 “이 역할을 맡았다”는 존재 증명이 쉽지 않다. 브랜드가 희미해질 위험을 상쇄하려면, 작품이 제공하는 ‘기회’가 브랜드 희생을 보상할 만큼 분명해야 한다.
이머시브 공연을 ‘공연’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관객과 배우가 그 안에서 얼마만큼 깊은 몰입을 공유하느냐에 달려 있다. 관객이 “이게 뭔지 모르겠는데 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장르는 이미 정의를 초월한다. Sleep No More 서울판이 직면한 과제는 단순한 투자 대비 성공이 아니라 ‘몰입의 지속 가능성’이다. 비밀은 언젠가 풀리지만, 그 비밀을 넘어서는 경험의 깊이는 설계할 수 있다. 제작사가 그 깊이를 유지한다면, Sleep No More는 한국 공연 산업의 패러다임을 다시 한 번 뒤흔들 마지막 퍼즐이 될 것이며, 이머시브 공연이 ‘공연인가 아닌가’라는 논쟁을 끌어안은 채 다음 세대로 도약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반대로 그 깊이가 얕아지는 순간, 배우의 브랜드도, 관객의 호기심도, 흥행의 불꽃도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선택은 제작진과 관객 모두에게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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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뮤지컬, 아시아 공연 산업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브로드웨이에서 토니상 6개 부문을 수상하며 한국 공연계에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운 가운데, 한국 뮤지컬계의 새로운 초점은 아시아 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난 6월 2일 열린 제5회 K-뮤지컬국제마켓은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다. 단순한 작품 거래를 넘어,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뮤지컬 시장의 통합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이번 행사에는 영국과 일본,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주요 국가를 포함한 9개국에서 총 139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며 전년 대비 200% 이상의 참여 증가율을 기록했다. 가장 눈에 띄는 논의는 ‘원 아시아 마켓(One Asia Market)’ 구상이었다.
이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등 아시아 주요 지역을 하나의 통합 공연 시장으로 묶자는 비전으로, 콘텐츠 공동 제작, 창작자 교류, 자본 협력, 인프라 공유를 골자로 한다. 2010년대 초반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실질적인 프로젝트가 등장하면서 이 개념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은 큰 시장을 가졌지만 아직 개발 단계, 일본은 시장 규모는 크지만 창작력 정체, 한국은 창작력은 뛰어나지만 내수 시장 한계가 있다는 진단과 함께 서로의 장점과 약점을 보완하며 공동 시장을 구축한다면, 이는 런던 웨스트엔드에 견줄만한 글로벌 문화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평가다.
실제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의 대형 공연 제작사 토호(TOHO)는 한국 작가와 작곡가를 기용해 뮤지컬 ‘미생’과 ‘이태원 클래스’를 제작했고, 작곡가 최종윤, 극작가 한정석 등을 일본에 초청해 현지 창작자 양성에도 나서고 있다. 중국 또한 단순 라이선스 수입을 넘어 공동 제작 모델로 전환하고 있으며, 2023년에는 한국에서 중국 뮤지컬 ‘접변’이 성공적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현재 한국(약 4,600억 원), 일본(약 7,165억 원), 중국(약 3,045억 원)을 합한 아시아 3국의 뮤지컬 시장은 1조 5,000억 원 규모에 이른다. 이들이 실질적인 통합을 이룰 경우, 단순 시장 규모 이상의 문화적 파급력과 글로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창작자와 제작사 중심의 협업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다. 국경을 넘어선 공동 제작이 꾸준히 늘고 있고, 한국 창작자가 아시아 무대에서 활동한 경험을 기반으로 웨스트엔드로 진출하는 선순환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K-뮤지컬의 글로벌화는 이제 꿈이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이 되어가고 있다. ‘원 아시아 마켓’은 그 출발점에서, 한국 공연 산업은 그 중심에 서 있다.
ILOVESTAGE 김준영 프로듀서
junyoung.kim@ilovesta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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