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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세손 윌리엄과 케이트 미들턴. 4월 29일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윌리엄 왕자에게는 케임브리지 공작 작위가 수여됐고 평민인 케이트 미들턴은 ‘케임브리지 공작 부인 전하빈’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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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과 사돈 맺은 중하층 미들턴가 신분 상승 하려면 3대 기다려야
영국의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이 지난 4월 29일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영국 전체가 왕세손 윌리엄과 평민 케이트의 결혼을 1982년 윌리엄의 부모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보다 더 큰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사실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은 엄격히 말하면 왕족과 귀족 간의 ‘그들만의 결혼’이었다. 그러나 이번 결혼은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정복왕 윌리엄 이후 영국 왕실 천년 역사상 진정한 의미의 왕족과 평민이 계급을 뛰어넘은 첫 결혼’이다.
계급 뛰어넘은 결혼영국인에게 있어 사회 계급은 상상을 초월하는 의미를 갖는다. 심지어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보다 계급의식이 잠재의식 속에 더 깊이 존재한다고 한다. 수많은 영국 영화나 소설은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과 결혼을 주제로 삼는다. 그런 영국 사회에 왕세손이 평민 출신 아내를 맞는다는 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영국 왕실의 의전은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철저해서 코미디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최근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나오듯 현직 왕이 이혼녀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겨우 반세기 후 왕권 서열 2위의 왕세손이 평민의 딸, 그것도 영국 상류층이 가장 하찮게 보는 물건을 파는 상인(미들턴의 아버지는 어린이 파티 기획 회사를 운영 중이다)의 딸을 배우자로 맞는다는 것은 영국 귀족이나 왕족들로 봐서는 살이 떨리는 사건이다.
윌리엄 왕세손의 어머니 다이애나비는 결혼 전에 유치원 보모였다고 하지만 평민 출신이 아니다. 그녀는 귀족계급(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중에서도 셋째인 백작 집안, 그것도 우리에게까지 유명한 윈스턴 처칠 총리와 연관이 있는 대단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는 먹고살기 위해 보모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결혼하기 전에 레이디(Lady) 스펜서 다이애나였고, 케이트와는 출발부터 신분이 달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든 계급이 존재한다. 그러나 영국 사회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계급이 철저하게 관철되는 나라는 드물다. 그것도 생활의 아주 작은 구석에 세세하게 나타나는 지독한 형태로 말이다.
영국의 계급제도는 결코 한두 가지 요인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빈부, 직업, 교육, 교양, 문화차이 같은 것만으로 판단하기도 힘들다. 이 모두를 통틀어서 구분 지어질 수도 있고, 다른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한두 가지 때문에 달라질 수 있는, 외부인으로서는 정말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스터리 투성이인 게 영국의 계급제도다. 결코 쉽게 규정 지을 수 없는 것들의 조합인데도 영국인은 만나자마자 상대방의 계급을 정확하게 구별해 낸다. 거기에 비해 계급구조는 보기보다 단순하다. 상류층(upper class), 중산층(middle class), 하류층(lower class)으로 구분하고, 다시 그 계급을 상중하로 나눈다. 예를 들면 중산층에는 중상층, 중중층, 중하층 등으로 나누는 식이다.
“생업종사는 아랫것들 하는 일” 상류층을 형성하는 영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업으로 하던 기사, 즉 무인(武人)이고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봉토가 부의 기반이 되는 지주(地主)다. 이들에게 있어 정상적이고 가장 고상한 생업은 봉토를 농노를 이용해 경작해 수입을 얻든가, 소작농에게 땅을 빌려 주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었다. 혹은 대도시에서 자신의 것이거나 왕에게서 빌린 땅에 건물을 지어 그 세를 받아 먹는 것이 최고의 생업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결코 존경받지 못하는 이 직업관이 아직도 영국 상류층을 지배한다. 그들에게는 고급의 전문직이건 아니건 직장에 얽매여서 생업에 종사하거나 무엇을 만들거나 혹은 판매해서 먹고사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중산층이나 하류층이 하는 일이었다.
중산층에도 업종에 따라 귀천이 있다. 농축산업(farmer)이 최상위였고 그 다음이 기술자(craftsman),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merchant)이 가장 낮은 업종이었다. 우리나라의 사농공상(士農工商)과 순서가 정확하게 같다. 그래서 중산층 중에 신분이 제일 낮은 상인이 돈을 많이 벌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시골에 땅(estate)을 사서 큰 집(manor house)을 짓고 가문의 문장을 만들어 시골 지주로 성가(成家)하는 것이었다. 이미 시골에 땅과 저택을 모두 가지고 있던 케이트 미들턴 가문이 이번에 왕실의 도움으로 가문의 문장을 받은 것으로 성가의 조건을 다 갖춘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 상류층은 미들턴 가문이 위에서 든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졌고, 더군다나 여왕과 사돈을 맺었다고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취급해 줄까. 아직은 아니다. 미틀턴 가문이 전통 상류사회층(일명 old money)들과 교류하면서 신분 상승을 꾀하려 해도 그들은 미들턴 가문을 누보 리치(Nouveau Riches·new money)라 부르며 졸부 취급을 하면서 교류를 꺼릴 것이다. 딸이 왕의 부인으로 왕비가 된다고 해도 미들턴 가문이 당대에 진정한 상류사회의 멤버가 되는 방법은 유감스럽게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비록 왕비로부터 정식 작위를 받는다 하더라도 기존의 상류층은 아직도 광택이 가시지 않은 미들턴 가문의 문장과 가슴에 찬 훈장을 보고 속으로 비웃는다.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아 귀족인 상원으로 진출한 마거릿 대처를 비롯한 영국 정부의 최근 역대 총리들도 아직은 상류사회 멤버로 받아들여지기에는 긴 세월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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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왕실 근위 기병대 |
귀족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런 전통이 없는 한국 상류사회의 구성원들은 영국 기준으로는 영원한 중산층이다. 판사, 변호사, 의사, 교수 등의 전문직종을 비롯해 당대에 부를 이룬 자수성가형 부호,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인 고위 공무원, 바람 한번 잘 일으켜 선출된 정치인, 그리고 세상을 쥐었다 놨다 하는 유명 사회문화 지도층 모두가 영국 사회 기준으로 보면 중산층에 불과하다. 당대의 성취로는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상류층은 타고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국 귀족은 피가 푸르다고 해서 블루 블러드(blue blood)라 하기도 하고 태어날 때 은수저(silver spoon)를 물고 태어난다고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왕족과 귀족 이외의 상류층 멤버는 누구인가. 오래된 고위 성직자 가문, 시작은 평민 출신이었으나 여러 대에 걸쳐 고위직을 배출한 정치인 가문, 오래된 지식인 가문을 예로 들 수 있다. 눈썰미가 있는 독자라면 앞의 예에서 등장하는 ‘오래된’ ‘여러 대’라는 말을 이미 주목했을 것이다. 상류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누구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굳이 예외를 찾는다면 당대에 비록 부를 이루었으나 그 이후 사회 전반에 걸친 각종 자선 혹은 사회 활동으로 높은 존경을 받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거부면 겨우 포함될 수 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거의 종족이 다르다고 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개념은 아니다. 그래서 장난이나 농담처럼 무시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절대 그럴 수가 없는 심각한 것이다. “무엇에 의해 계급이 구별되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으면 바로 조금 전까지도 심각하게 계급의식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영국인도 우물쭈물한다. 영국인에게 있어 계급의식은 국어 문법 같은 것이라 그 개념을 정확하게 정리해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냥 본능적으로 구분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글로써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규정 지을 수 없는 개념이다. 물론 많은 흥미 본위의 책들이 이것저것 말하고는 있지만 딱 부러지게 규정하는 것은 없다. 그래도 영국인은 누구나 다 안다. 그래서 누군가가 계급 코드에 어긋나는 언행을 할 때면 즉시 주위 사람으로부터 눈총을 받기 마련이다. 계급 코드를 깬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표시를 안 한다 해도 이웃 사람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비난의 눈짓을 눈치 못 챌 영국인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절대 태생 영국인이 아니다.
케이트 어머니 ‘toilet’ 때문에 망신
계급 구분은 결코 하나의 기준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예로 들어 보자. 중간 정도의 재산을 가진 층이라는 경제적 의미를 기준으로 하는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대 아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하류층 말을 쓰거나 교육 수준이 낮거나 교양이 모자라면 결코 중산층에 낄 수 없다. 돈, 교육, 교양, 언어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도덕성, 예의에서 모자라면 이 또한 중산층의 결격 사유에 해당한다. 심한 경우에는 위에서 얘기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해도 그 사람의 부모가 중산층이 아니라면 완벽한 의미의 중산층은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영국에는 “젠틀맨을 만드는 데 삼대가 걸린다”는 말이 있다. 돈 많은 하류층 부모가 자식이 모든 것을 갖추도록 키워도 그 자식은 결코 신분 상승이 되지 않고, 손자대에 가서야 비로소 그 비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신분 상승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고 계급 사이의 간격이 넓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국 사회를 바꿔 놓아 전 세계에서 존경을 받았던 대처도 총리를 그만두고 상당한 기간이 흐른 뒤에야 고급 사교클럽의 멤버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계급의 벽을 뛰어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사실 이 계급 차이에서 제일 메우기 힘든 것이 말이라고 한다. 필자가 근무하던 회사 창고 책임자는 사립학교를 나와 런던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지식인이다. 아버지가 공장을 운영하며 돈을 많이 벌어 자식 교육에 투자를 했다. 그런데도 사무직을 택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더니 “계급 차이”를 얘기하면서 말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말은 도저히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계급에 따라 쓰는 단어도 다르고 발음, 악센트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케이트의 어머니가 왕궁의 모임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화장실을 루(loo) 혹은 레버토리(lavatory)라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토일렛(toilet)이라고 해서 상류층 사이에서 ‘역시 천한 것들은 할 수 없어’라고 난리가 났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예다.
귀족은 ‘lavatory’ 평민은 ‘toilet’ ‘pardon’도 상류층은 사용 안 해
냅킨·점심·화장실… 중죄 적용되는 대표 단어 신분은 언어에서 시작한다
영국인은 신분은 언어에서 시작한다고 여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자주 ‘실례합니다’ 혹은 ‘뭐라고 하셨어요? 다시 한 번 말해 주시겠어요?’라고 할 때 쓰는 ‘파든(pardon)’이라는 단어는 상류층이나 중상층에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써서는 안 되는 단어다. 심지어 그 말은 ‘성교(sex)’라는 단어만큼 심한 단어라고까지 말한다. 이 말은 중하류나 중중층이나 쓰는 말이고, 중상층은 소리(sorry), 상류층과 노동계급은 왓(what)이란 단어를 써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높은 계급과 낮은 계급이 같은 단어 ‘What’을 쓴다는 것이다. 그 말을 포함해 영어에는 계급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잘못 쓰면 점잖은 자리를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말들이 있다. 이른바 7대 중죄가 적용되는 영어 단어는 파든, 냅킨, 점심, 화장실, 긴의자, 라운지, 후식이다. (인용: 졸역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 케이트 폭스 지음, 2004년, 학고재)
이처럼 심각한 계급사회 영국에서의 말의 중요성의 예로 버나드 쇼 원작의 ‘피그말리온(pigmalion)’을 영화화한 오드리 헵번 주연의 ‘마이페어 레이디’(1964)가 자주 거론된다. 런던의 한 극장 앞에서 꽃을 팔던 하류층 소녀를 언어학자가 내기 삼아 귀부인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영화를 보면 소녀에게 걸음걸이, 식사 예절, 옷 입는 법 등 모든 것을 가르친다. 거기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바로 말이다. 그만큼 말이 계급을 구분하는 제일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임대주택에 살고 청소부를 해도 중산층 말을 쓰면 중산층이라는 것이다.
영국인의 집은 거의가 주택이다. 길가에 늘어선 단독주택이나 이층의 연립주택 앞뒤에 정원이 있는데 이것을 보고도 그 집 주인이 속한 계급을 알 수 있다. 정원 디자인은 물론이고 거기에 심어진 화초와 놓인 장식물까지도 계급 코드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가다 보면 영국인이 “움직이는 집”이라고까지 중시하는 자동차에도 계급 코드가 없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중상층이나 상류층은 대부분 영국제 차를 타지, 차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중중층·중하층·하류층처럼 일제나 미제를 타지 않는다. 심지어는 차 청소를 하느냐 안 하느냐로도 구분을 하고, 차 유리창에 붙은 스티커로도 계급을 따진다. 화장실에 놓인 책 종류에서도 집주인의 계급이 나온다. 영국인의 사랑방인 펍(pub)에도 계급 코드가 없을 리 없다. 계급에 따라 자리가 구분되어 있다. 지금도 많은 펍은 문이 두 개 있고 거기에 따라 바도 갈라져 있는 경우가 있다. 중산층이 들어가는 문에는 바(bar)라고 쓰여 있고 하류층이 들어가는 문에는 펍(pub)이라 쓰여 있다. 물론 지금은 구분이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따로 앉고 펍 자체가 신분에 따라 갈라지는 경우도 있다.
체념의 삶에 익숙한 하류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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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남편 에든버러공 |
대처 시대를 지나면서 영국 사회는 아주 큰 변화를 겪었다. 대처 정부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고 있던 임대주택을 모기지(mortgage)라는 주택 융자를 통해 개인 소유로 많이 전환시켰고, 그를 계기로 중산층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하류층이라고 믿던 사람을 집을 가진 중산층, 엄격히 말하면 중하층으로 진입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런 조류에도 끼지 못하고 장기적 실업 상태가 계속되어 실업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새로운 최하류 계급인 언더클래스(under class)도 생겨났다.
영국에서 하류 계급의 존재는 조금 불가사의한 것도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나라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게 되어 있고, 그 무상교육의 수준은 세계 어디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의 데이비드 캐머런 정권은 재정 적자를 메우느라 대학 학비를 자국민에게도 300%나 올려 공부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과거에는 공부할 기회를 전 국민에게 다 주는 데도 불구하고 불과 고등학교 졸업생의 5% 남짓만 대학 진학을 했다. 하류층이 교육을 통해 신분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대처 정부 때부터 아메리칸 드림 같은 기업가 정신이 팽배해지면서 대학 진학을 권장했고, 또한 취업난 등으로 인해 대학 진학률이 4배나 올랐다.
그래도 아직 영국의 하류층은 ‘기본적인 계산조차 안 되고, 역사의식도 사회의식도 없고, 정치나 사회 이슈에도 무관심하고, 극도로 교양이 없고,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리는 계급’이라고 묘사된다. 하류층 부모는 굳이 신경을 안 써도 국가가 보살펴 준다는 생각 때문에 자녀 교육에 별로 관심을 쏟지 않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고, 너희가 그렇게 아등바등 공부해 봐야 신분을 벗어나기 힘드니, 괜한 헛수고 하지 마라’고 기를 죽이는 분위기였다. 그냥 기본 학력만 갖추고 사회에 나와 취직하고 그렇게 살다가 은퇴해서 연금이나 받고 살아가는 것이 하류층의 인생에 대한 기본 태도이고 목표다.
계층 간 이동 어려워 체념·패배주의 뿌리박혀
“공부해봤자 신분 못 벗어난다” 하류층, 자녀 교육에 무관심
경제활동은 중산층에 맡기고 귀족은 유유자적하면서도
봉사활동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 재산 상속 대신 사회 기증
대처 총리 아직도 ‘잡화상 딸’
물론 대처 정부 이후 제도가 바뀌면서 하류층의 생활도 많이 바뀌긴 했으나 아직도 이런 틀에서 크게 못 벗어난 것이 사실이다. 대처 총리는 지금도 노동계급으로부터는 노동조합을 압박하고 실업수당을 줄이는 등 자신들을 끝까지 못살게 군 노동계급의 적으로 간주된다. 상류층 역시 ‘잡화상 딸’이라고 부르면서 중산층 출신이라고 은근히 왕따시킨다. 그녀를 이은 존 메이저 총리는 서커스 광대의 아들이었다. 그 뒤를 이은 노동당 정부 총리들도 결코 중산층 이상이 아니었다. 물론 그 밑의 장관들도 중산층의 자녀들이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영국을 이끌고 있는 것은 상류층의 자제들이 아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그 자리까지 오른 중산층의 자녀들이 나라의 권력을 잡고 흔드는 동안 상류층은 시골에서 취미로 양이나 키우고 농사나 지으면서 부동산 개발과 금융 투자나 하며 부유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굳이 밤을 새워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매달리는 것은 영국 상류층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영국 상류층이 욕을 안 먹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구정물에 손을 담그지 않고 잘 살아가면서도 철저하게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와 의무에는 충실하다. 자신들이 가진 부와 시간, 그리고 영향력을 이용해 각 분야에서 자선이나 봉사활동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걸 자신들의 임무라 여긴다. 우리의 일부 재벌처럼 온갖 꼼수를 써서 상속세를 덜 내며 자식에게 부를 물려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사회에 대한 또 하나의 의무로 생각한다. 영국 대도시 건물 주인 중에는 개인이 거의 없다. 상속세가 엄격하고 부의 상속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율의 상속세를 먼저 내야 하니 물려받기도 힘들고 자식이 그것을 받아 봐야 관리도 제대로 안될 바에는 아예 자신의 모교나 사회단체 등에 기증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영국의 대도시 상업 건물은 대개 학교 재단이나 연금공단, 은행, 보험회사 등의 소위 말하는 기관(institution) 소유이고, 시골의 귀족 대저택은 대부분 문화재보호재단(National Trust, English Heritage 등) 소유다.
이런 것들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 oblige)라 할 수 있다. 우리 언론은 이 단어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 단어를 쓸 때면 꼭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들이 전쟁에 참전한 것을 예로 든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져보면 이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경우가 아니다. 영국 왕족이나 귀족은, 문인(文人)이 귀족인 우리와는 달리 태생적으로 군인이다. 특히 여왕의 왕자들은 예비역 혹은 현직 군인이다. 군인이 나라에 전쟁이 나면 참전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왕자들이 군복무를 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 언론은 그것을 귀족층의 사회적 의무의 표상처럼 치켜세운다. 칭찬은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했을 때 하는 것이지 당연한 일을 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다.
중산층으로 살아가기
이런 면에서 보면 영국 중산층의 사회적 역할도 상류층의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엄격히 따지고 보면 중산층으로 살아가기는 상류층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시간과 돈이 풍부한 상류층과는 달리 모든 것이 여유롭지 못하다. 반면에 중산층은 하류층처럼 내키는 대로 살 수도 없다. 자식 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교양 있는 행동도 해야 하고 문화 수준에 맞는 활동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도 하류층과는 달리 봉사와 자선을 해야 한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영국 중산층들도 수입과 시간을 십일조 하는 식으로 각종 자선과 봉사를 해야 한다. 그런 것들 중 한두 개만 소홀히 해도 바로 신분 하락의 모욕을 당하게 된다. 영국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가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영국에서 살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영국 하류층의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 결여다.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신분 유지 혹은 상승에 대한 욕구나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머리가 빠질 지경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원하고 노력하는 만큼 계층 간 이동이 가능한 역동적인 사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 영국은 사회계층 간 이동이 어려워 주어진 틀 안에 안존하는 체념과 패배주의로 점철된 사회다.
기다리는 케이트(Waity Katie)
솔직히 말해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어도 영국인에게는 우리처럼 금방 신분 유지가 가능하지 않게 되는 데서 오는 불안감과 초조감이나, 잘된 이웃을 볼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고통은 크게 없는 것 같다. 영국의 하류층은 거액의 로또에 당첨되어도 종전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그 직장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한다. 여기선 돈이 있다고 신분이 상승되는 것도 아니고 부촌으로 옮겨 간다고 당장 그 부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낯선 곳에서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하는 영국인은 아무리 돈이 많이 생겨도 잘 이사하지 않는다. 그냥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기본 교육만 받고 고만고만한 배우자와 결혼해 지방 기업에서 만만한 직업을 가지고 같이 자란 친구들 사이에서 그렇게 살다가 자식 낳고 어쩌고 저쩌고 사는 것이 하류층의 꿈이다. 단조롭고 무료한 삶 같아도 이것이 영국인들이 가장 꿈꾸는 ‘예측이 가능한, 그리고 안정된 삶(predictable and secured life)’이다.
영국인은 믿는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지도층 일부이면 족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살면 된다고. 바로 그것이 이들이 얘기하는 체제 안의 계급에 충실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제 현대판 신데렐라 케이트 미들턴은 별명 ‘기다리는 케이트(Waity Katie)’처럼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완벽하게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신분 상승이 행복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녀를 걱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백작 집안의 다이애나도 차별과 멸시를 못 견디고 결국 왕궁을 나갔는데, 어떻게 평민 출신인 케이트가 견딜 수 있겠느냐고 걱정한다. 반면 그 오랜 시간을 자신의 목적(혹은 사랑?) 하나를 위해 견뎌온 그녀가 보기보다 잘할 것이라고도 한다.
계급과 신분에 얽매여 있는 영국 왕가와 사회는 이번 결혼으로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그것이 시대의 변화에 대비하고자 하는 영국 왕가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일반 유치원에서 아들들을 교육시키며 자신을 던져 왕가의 전통 방식에 도전하다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윌리엄의 어머니 다이애나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글쓴이 :
권석하
보라여행사 대표이사, IM컨설팅 대표.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
약력 :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주재원으로 영국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 번역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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