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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처럼 나타나는 정치인은 영국에 없다
코리안위클리  2012/11/07, 08:17:00   
▲ 2010년 4월 총선 당시 열린 마지막 TV토론. 왼쪽부터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현 총리), 닉 클레그 자유민주당 당수, 노동당 고든 브라운 당시 총리.

영국에서 본 예측 불가능 한국 대선

조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과격하게 한번 시작해 보자. ‘도대체 한국인은 무엇을 보고 투표를 하나?’ 한국 대선을 보고 느끼는 의문이다. 해외에 살아도 한국 대선에 대한 관심은 국내에 있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다.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살펴봐도 이번 12·19 대선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누가 당선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당선되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를 모르겠다는 말이다. 또 각 후보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사안에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검증 없이 마냥 소소한 흠집을 가지고 난리들이다.
선거에서는 후보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나 불법적 행동에 대한 검증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차라리 당선됐을 때 어떤 정책을 어떻게 펼칠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불안한 이유는 미래에 대해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어떻게 바뀌고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안심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 선거판에서는 누구도 속 시원한 정책을 내놓는 후보가 없다. 이제 발표한다 해도 졸속으로 급조된 정책이 뻔하니 믿을 바도 안 되고 신빙성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나 자신도 한국에 있을 때 과연 무슨 근거로 후보자를 판단해 투표했는지를 생각해 보니 거의 ‘바람’ ‘분위기’에 휩쓸려 투표를 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제 대선이 겨우 한 달 조금 더 남았다. 그런데 유권자에게 제시된 각 후보들의 국정 청사진은 겨우 구호 몇 개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의 어느 선거와 다를 바 없이 그냥 ‘바람의 정치’를 하고 있다. 매번 이렇게 반복되는 한국 정치판이 안타깝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한다. 내가 겪어본 몇 번의 영국 정치와 비교해 보며 답답함을 나누고자 한다.

내각책임제인 영국 정치는 대통령중심제인 한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각책임제는 국회의원 과반을 차지하는 당의 대표가 총리가 되어 정부를 구성하는 제도다. 영국 유권자에게는 우리와 달리 총선과 대선을 구분하는 개념이 없다.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만 뽑으면 전국적으로 그 결과가 모여 여당이 결정되고, 그 여당에 의해 내각이 이뤄진다. 그래서 내각책임제 국가의 유권자는 투표 시 대통령중심제 유권자보다 투표 결정이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 쉬운 점은 국정을 책임질 대통령과 지역구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구분해 결정할 필요없이 그냥 국회의원만 잘 뽑으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일 유권자가 후보의 당을 볼 것인지, 후보 개인만 보고 투표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았거나, 국가 대의와 지역구 이익 중 어느 기준에 근거해 투표할 것인지를 잘 모른다면 그 결정은 쉽지 않다.

영국인에겐 정당도 클럽의 하나

대통령제에서는 어차피 국정은 대통령이 끌고 가게 돼 있다.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국회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많은 경우 여소야대 혹은 몇 개 당이 거의 균등하게 국회 의석을 점하기도 한다. 이럴 때도 대통령은 어렵기는 하지만 국정을 각 정당과 협상을 통해 잘 끌어갈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이나 일본 같은 내각책임제 국가에서는 여당이 국회의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면 내각 구성을 할 수 없다. 선거 결과 제1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 다른 당과 연합을 해서라도 과반을 만들어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내각책임제에서는 후보 개인보다는 당이 더 중요하다.
영국은 클럽의 나라다. 영국인에게는 정당도 클럽의 하나다. 거의 모든 영국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클럽이 있듯이 정치에 관해서는 지지 정당이 있다. 거금을 들여 연간 티켓을 끊어 매 경기를 빠지지 않고 가는 열광 축구팬이 있는가 하면, 그냥 집에서 TV로 보면서 응원만 하는 소극적 팬도 있다.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정 정당에 가입해 평소에도 계속해 활동을 하는 등록 당원도 있고, 비록 등록 당원은 아니나 평상시 그냥 공개적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정책에 관해 얘기하는 소극적 유권자도 있다.
현재 연립정권을 구성한 보수당과 자유민주당의 당원 수가 각각 13만명과 5만명이다. 제1야당인 노동당이 두 여당을 합친 수보다 많은 20만명이다. 이런 숫자만 보면 영국 정당의 당원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이 당원 숫자는 그냥 정당원으로 등록만 하고 당비도 안 내고 활동도 하지 않는 당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국의 각 정당 당원들은 당원 등록을 하면 당비를 내고, 투표권은 당비를 낸 이들 당원에게만 주어진다. 동시에 당비를 내는 당원은 거의가 다 활발하게 활동을 한다. 그래서 영국 정치에서 평당원의 역할은 지대하고 영향력 또한 크다. 당원들이 내는 당비가 당 활동자금의 가장 큰 수입원이고 당원들의 노력봉사 없이는 정당이 전혀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 선거철이 돌아오면 지구당 평당원들의 노력 없이는 선거운동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선거홍보물 배부부터 가가호호 방문해 투표성향을 조사하고(canvassing), 투표 당일 자신의 정당 지지자에 대한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전화나 대문을 두드리는 일(knocking) 등은 선거운동의 기본인데, 이는 평당원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평당원의 역할이 가장 커

거의 모든 선거의 후보 공천이 중앙당이 아니라 각 지구당 단위로 이루어지니 평당원은 그 역할뿐만 아니라 권한 또한 크다. 결국 정당의 주인은 대표나 중앙당 일부 당직자가 아니라 평당원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해서 영국에서는 바람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정치 신인이 대권을 잡는 일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 심지어는 국회의원마저 하루아침에 나올 수 없다.
영국에서 정치인 입문은 대개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구당에서 평당원으로 가입해 착실하게 활동을 하고 시의원을 비롯해 지역에서 기반을 쌓은 다음 지역 당원들에 의해 지역구 국회의원 공천을 받는 경우가 하나다. 다른 하나는 국회의원 보좌관 혹은 중앙당에서 직책을 맡아 오래 경험을 쌓은 후 지역구로 내려와 공천을 받는 경우다. 어떤 경우에도 한국과는 달리 지역구 당원들의 투표를 통해 공천이 이뤄진다. 영국에서도 인기인들이 정치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도 밖에서 잘 몰라서 그렇지 반드시 평소에 해당 지구당에서 일해 왔음이 분명하다. 영국 국회의원은 절대 한국같이 중앙당 밀실 정략에 따라 지역구 당원들의 의사에 반해서 공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원으로 오랫동안 당 활동을 하면서 당의 철학이나 정책을 배우고 동시에 지방정치나 지역구 기반을 쌓은 후 절차를 밟아야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정치인의 가장 기본적인 시작은 지역구에서 평당원으로서 활동하는 것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풀뿌리 정치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한국으로 치면 통반(ward) 당 모임 활동부터 시작된다. 평소에는 인쇄물 배포가 주된 업무다. 지구당에서 하는 정책설명회나 국회의원 의정보고에 참석해 설명을 듣고 질문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들 통반 모임 활동비나 지역구당, 혹은 지역구 국회의원 후원금 모금운동 파티도 조직한다. 당 전당대회에 대비해 모임별로 정책토론회를 열어 지역 당원들이 생각하는 정책의제를 토의·결정해서 지역구 대표로 하여금 당 정책에 반영하도록 한다. 선거가 닥치면 선거인명부를 근거로 각 집을 방문해 그 집의 구성원을 파악하고 투표 성향을 조사한다. 동시에 선거 홍보물 배포도 당원으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영국 정치는 상향식 정치다. 모든 정치활동은 자발적인 평당원으로부터 시작된다. 돈과 시간과 노력을 바쳐 적극적으로 당 활동을 하는 평당원인 영국인이 바라는 바는 큰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과 맞는 당을 통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가 이뤄지는 것을 보고 싶다는 열망뿐이다. 자신이 속한 통반 모임에서 거론되고 토의되어 지구당 정책총회를 거쳐 전당대회 의제로 제출한 정책이 당 정책이 되고, 국회에서 국가정책으로 채택되어 현실로 나타날 때 희열을 느낀다.

정책토론의 장인 전당대회

영국 전당대회는 정말 정책토론의 장이다. 대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로부터 받아 온 정책이 당 차원에서 채택되게 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에서는 숭고함을 느낄 정도로 진지하다. 자신들 지역구에 다리를 놓거나 포장도로가 놓여 자신의 주머니에 실제적 이익이 돌아오는 일을 위해 뛴다 해도 저 정도로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영국인은 국가정책은 길거리에서 데모나 화염병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로를 통해 제대로 노력하면 ‘내 손’으로도 된다는 믿음이 있고 실제 그런 실례를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열성을 다한다. 그런 신념이 있기에 영국 각 당의 평당원들은 연차 당비뿐만 아니라 지역구당 혹은 통반 회비까지 내고 때로는 중앙당에서 걸려오는 권유 전화를 받고 특별회비도 기꺼이 낸다.
이렇게 지역당을 기반으로 한 공천과 당원들의 자발적인 봉사와 활동을 기반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은 지역구를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런 일에 소홀하면 다음 선거에는 평당원들의 활동이 줄어들어 자신의 당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정치자금을 풀어 조직활동을 가동하지도 않고 그럴 만한 자금이 나올 구멍도 없다. 그래서 영국 국회의원들은 휴가철을 제외하고 일년 내내 열리는 상시국회이기에 바쁜데도 불구하고 지역구 활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가 속한 지역구 국회의원은 현직 장관이다. 에드워드 데이비 에너지·기후변화장관이다. 그런데도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오전시간을 내어 지역구민을 만난다. 약속 없이 가도 순서를 기다리면 면담이 가능하다. 딱히 정해진 시간도 없으니 끝없이 하소연을 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고 해결책도 강구해 준다. 영국 국회의원들에게 이런 개인 민원은 바로 의정활동 중 하나다. 심지어 비자를 담당하는 내무부 이민국에 국회의원 민원 서류 담당과가 있을 정도고, 국회의원 편지가 첨부된 비자 서류는 거의 통과된다는 속설이 있다. 외국 출신 영국인은 해외에 있는 친지를 초청하려 할 때 그들에게 비자가 나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 국회가 열리는 상시 국회에, 그것도 각료로서 국회 앞자리(front bench)에 앉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답변을 거들어야 하는데도 지역구에 열심이다. 동시에 자신이 담당하는 부처 결재도 해야 하는데 언제 이런 지역구 활동까지 할 수 있는지 정말 영국 집권당 국회의원은 초인이어야 하지 싶다.
이런 지역구 대민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영국 국회의원 지역구민 숫자가 한국보다 아주 적기 때문이다. 6000만 인구의 영국은 하원 650명, 상원 788명의 국회의원을 두고 있다. 영국 국회의원 숫자는 5000만 인구에 국회의원 300명인 한국의 두 배가 넘는다. 적은 숫자의 지역구민들을 상대하다 보니 한국 국회의원보다는 대민활동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을 수도 있다. 지역구민들을 직접 대면하고 그들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작은 국회가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 영국에는 야당 국회의원도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에 소속되어 부처별로 일을 맡는다. 비록 야당이라도 정부 내각 직책과 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 영국에는 야당 국회의원도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에 소속되어 부처별로 일을 맡는다. 비록 야당이라도 정부 내각 직책과 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약속 없어도 면담 가능한 국회의원

영국 국회의원들도 초선 때부터 국회 내 각 분과위원회에 소속되어 의정활동을 한다. 영국이 내각책임제여서 내각 각료들이 모두 국회의원이고 기타 정부 주요 직책도 거의 국회의원이다 보니 모든 여당 의원들은 초선 때부터 정치뿐만 아니라 행정부 일까지 직접 하게 된다. 정부가 국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니 여당 의원이야 물론 정부로부터 각종 자료와 정보를 공유하지만, 야당 의원이라고 해서 정부 일로부터 소외되지도 않는다. 특히 영국에는 야당 국회의원도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에 소속되어 부처별로 일을 맡는다. 비록 야당이라도 정부 내각 직책과 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행정부는 거의 모든 정보를 해당 부처별로 여야 의원에 같이 제공한다. 때로는 정보 등급이 다르다고 야당이 불평하는 일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다. 야당이라고 홀대할 수가 없고 하지도 않는다. 언제 정권이 바뀌어 야당이 여당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국 정치인의 전공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한번 상무부로 시작하면 계속해서 상무부 담당이고 그러다 다선 의원이 되면 언젠가는 상무장관이 된다. 영국의 장관은 이렇게 오랜 기간 훈련과 실무를 거쳐 임명된다. 갑자기 정치적으로 임명되어 업무를 파악할 때쯤 그만두어 해당 행정부처에서 아예 손님으로 취급하는 한국의 장관들 하고는 애초에 차원이 다르다. 기자들과 취임 인터뷰를 하면서 첫마디부터 준비된 정책을 자신 있게 나열해도 놀랍거나 경악할 일이 아니다. 아직 업무 파악이 안 되어 의견을 말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올 수가 없다. 또한 기존의 정책과 아주 다른 정책을 말해도 놀랄 수가 없다. 이미 그 사람은 야당에 있을 때부터 당의 정책과 자신의 철학으로 그런 정책을 주창해 왔을 터이기 때문이다. 내각 내에서 자리 옮김을 했다고 해도 이미 그 전에 내각회의에서 해당 정책에 대해 발언한 전적으로 보아 이미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정치인의 전공

영국 내각의 제2인자는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이다. 서열상으로는 외무장관이 2위로 돼 있으나 대개 재무장관이 차기 당 대표감이고 총리감이다. 대처 총리가 당내 반란에 의해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선거 없이 총리가 바뀔 때도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존 메이저가 총리 자리를 이어받았다. 물론 당시 집권당 의원총회에서 투표를 통하는 절차를 밟기는 했지만 정해진 수순에 따랐을 뿐이다. 사실 존 메이저는 당시 대처를 물러나게 했던 악수(惡手)인 ‘인두세(poll tax)’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했던 장본인이었는데도 말이다. 현재 재무장관은 조지 오스본이다. 그는 야당 시절인 2005년부터 그림자 내각의 재무장관을 역임했고 2010년 집권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재무장관이다. 만일 경제가 계속 어려워 민심이 흉흉해져 여당으로서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고, 변혁을 요구하는 여당 내부 반란이 일어나 새로운 총리가 들어선다면 몰라도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차기 총리 후보로 조지 오스본이 1번이다. 해외에서는 토니 블레어, 데이비드 캐머런 등을 변혁을 요구하는 시대 조류에 맞추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젊은 인재들이라 얘기했지만 사실 영국 내에서 이들의 이름은 머잖은 장래에 총리가 될 사람들 명단에 오르내렸다.

정치는 이론 실험의 장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는 정치인은 없다. 차기 총리마저 예측이 가능하고 검증이 가능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국리민복을 담당할 정치인은 이미 그 사람의 정치철학이나 과거 행적이 잘 알려져 있어 국민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예측이 가능한 정치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인이 가장 바라는 삶이 예측 가능한 삶이다. 내일 무엇을 할 것인지, 일년 뒤 휴가는 어디로 가고 몇 살에 은퇴해서 어떤 수준의 삶을 살 것인지를 계획하고 거기에 맞추어 평생을 준비한다. 개인의 삶도 이렇게 예측이 가능해야 안심하고 행복하다고 믿는데 국가정책은 더더욱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고 영국인들은 믿는다.
정치는 국민과 국가를 대상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정책으로 이론을 실험하는 장이 돼서는 안 된다. 각 당에서 당 기구나 당원들을 통해 오랜 기간 연구되고 검증되어 국민에게 검토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주고, 당 정책으로 제시된 후 선거로 동의가 된 정책으로 국가를 경영해야 국민이 따른다.
영국에서는 재정악화로 복지가 줄어들고 연금 수혜 연령이 높아져 당장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는 데도 불구하고 다른 유럽 나라들과는 달리 별다른 소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국민과 합의된 정치제도와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민심이 반영된 풀뿌리 정책이 정부정책으로 채택됐기에 국민도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책을 시행하는 정치인에 대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인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랜 기간의 충분한 검증과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결정적인 패착(敗着)을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결정을 내렸을 때는 다른 선택이 없고 국가를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영국인은 본다. 비록 인기 없는 정책을 시행해도 사심이나 당리당략으로 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선의로 하는 것임이 과거의 언행으로 보아 증명되기 때문이다.
사실 정치인에 대한 검증은 과거의 언행에 대한 검증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동안 해당 분야 정책에 대한 실적도 검증돼야 한다. 그래서 영국 정치인의 이력에는 해당 의제에 대해 어떤 발언을 했고, 특정 정책에 어떻게 투표를 했는지가 반드시 따른다. 물론 경험이 있다고 해서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경험이나 실적이 증명되지 않았거나, 해당 분야에서 전혀 실무 경험 없이 학계의 이론에 밝은 교수들이 갑자기 정치인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최소한 영국 정치에서는 없다. 교수도 공무원도 하루아침에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중앙당에서 공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역구 기반이 없으니 지역구에서 당원들 공천을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영국인은 ‘검증되지 않은 정치인은 검증되지 않은 약보다 더 나쁘다(Untested politician is badder than untested drug)’고까지 한다.

정치는 생계수단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그럼 정치는 전적으로 전업 정치인이 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하는 명제가 논쟁의 요지로 떠오른다. 영국의 국회의원은 원래 겸업 국회의원이었다. 그래서 최근까지 영국 국회는 오후에 열렸고 항상 자정을 넘어서까지 계속됐다. 그 이유는 오전에는 자신들 생업을 영위하고 오후에 정치를 하러 나오라는 뜻이었다. 여기에는 전업 정치인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믿음도 한몫했다. 동시에 세상을 바르게 하고 국민을 먹여살리는 숭고한 일인 정치는 고상한 신사들이 순수한 사명으로 할 일이지 생계수단으로 할 일은 아니라는 취지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한때 겸업 국회의원이 있었던 적이 있다. 전업 정치인은 정치의 생리상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영국 국회의원이 겸업이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역사적으로 영국의원은 원래 자신의 직종의 이익을 대변하는 직능대표로 시작됐다. 영국에서 유일하게 공화정을 이룬 크롬웰 시민혁명을 이끈 국회의원들도 모두 직업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시골 지주 농부들이거나 상공인이었다. 소위 얘기하는 젠트리(gentry)라 불리는 부유한 양민(良民) 계급이었다. 이들은 ‘세금을 내는 곳에 대의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정치철학을 주장하는 계급이었다.
영국인들이 보수적이라는 말에 대한 해석을 필자가 전에 썼던 글에서 다시 한번 인용하면 ‘보수란 기존의 것을 지키려고만 하고 새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쓰는 말이 아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결정을 한다는 것에 그 뜻이 더 가깝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영국인은 검증되지 않았거나 과거의 실적이 없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뜻에서 보수적이다. 새로운 음식을 시도해보지 않고 휴가도 가는 곳으로 늘 가는 행태에서 보수적인 영국인을 보기도 하지만 모험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정신에 충만한 사람들도 영국인이다. 영국인은 영국 최고 인기 재벌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란슨의 얼토당토않은 모험에 열광해도 정치에서만은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영국인은 검증되고, 토의되고, 동의된 정책을 인정한다. 영국 정당은 기존 정책에다 전당대회를 통해 채택된 새 정책을 얹어 다시 유권자들에게 내놓는다. 소위 말하는 정책안(manifesto)을 유권자들과 언론 등에서 충분히 검토·논의될 시간을 두고 발표한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 이러한 정책안은 서점에서 판매됐고 수십만 부씩 팔려 당 재정에 큰 몫을 했었다. 각 분야에 걸쳐 아주 자세하게 자신들 당이 지향하는 바를 설명하고 약속했다. 자신들이 집권하면 어떤 정책을 펴겠다는 약속이었다. 유권자들 중 특히 어느 정당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중간층(swing voter)들은 이러한 정책안을 꼼꼼히 살펴보고 결정을 한다.
대선 투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향후 5년간 나라를 이끌어갈 정책이 몇몇 인사들의 밀실 토의에서 겨우 만들어져 발표되는 기막힌 현실이 한국 대통령 선거판이다. 그나마 구호만 있지 구체적 실천 사항은 없다. 특정 사안에 대한 정책은 위원회를 만들어 하겠다는 발표뿐 어떤 방향으로 개혁하겠다는 말이 없다. 대통령의 정책은 기가 막힌 아이디어로 순간적으로 유권자들의 감각을 자극해 표를 받아내는 광고가 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선거에서 TV 광고가 금지돼 있다. 입후보자 누구에게나 똑같이 제공되는 수차례의 BBC 공영 TV 광고뿐이다. TV 광고로 발생할 과도한 선거비용으로 인한 문제도 막을 겸 감각적 선전으로 투표가 좌우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국 정치는 제도와 경험의 정치다. 자신을 뽑아준 국민이 백지수표를 줬다고 믿고 전혀 증명되지 않았고, 자신이 옳다고 믿고, 혹은 주위 몇 명이 주장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우를 영국에서는 범할 수 없다. 정치인들이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해도 정치의 목표는 국민이 잘 먹고 잘살기여야 한다. 개인의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에도 자료와 공부가 필수인데, 검증 안 된 ‘카더라 통신’이 선거판을 좌우하는 한국을 보면 선도 안 보고 결혼 당일 만나 결혼하던 옛날 우리 부모 세대의 결혼식이 생각난다. 하긴 그분들의 이혼율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으니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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