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며 2025년 토니상 10개 부문에 공식 노미네이트되는 전례 없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는 단순한 해외 진출이 아닌, 한국 공연예술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정당성을 획득한 결정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 이와 같은 사례는 뮤지컬에서 가능했고, 연극에서는 여전히 찾아보기 어려운가? 이는 단순한 장르 차원을 넘어, 제도, 시장, 정책, 그리고 창작 생태계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질문이다.
한국의 공연예술은 오랫동안 연극 중심의 정책 아래에서 발전해 왔다. 1960년대 이후 국공립극장과 연극 전공 교육을 기반으로 구축된 체계는 장르를 분화하기보다는 연극이라는 틀 안에서 통합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강했다. 뮤지컬은 오랜 기간 ‘부속 장르’로 간주되어, 별도의 창작 생태계나 산업적 인식 없이 존재해 왔다. 2022년 공연법 개정을 통해 뮤지컬이 법적으로 독립 장르로 인정받았지만, 문화예술계 내부의 위계는 여전히 ‘연극은 예술, 뮤지컬은 상업’이라는 이분법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해피엔딩>은 이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돌파한 사례다. 이 작품은 한국의 박천휴 작가와 미국의 윌 아론슨 작곡가가 협업하여 완성한 순수 창작 뮤지컬로,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섬세한 언어와 정제된 음악으로 풀어냈다. 국내 초연과 재연을 통해 검증된 이 작품은, 해외에 맞춘 현지화 없이도 오리지널 그대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자본력에 기대지 않고 창작의 순수성과 한국 관객의 반응만으로 세계 무대에 진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고유한 창작물이 국제적 감수성과 경쟁력을 동시에 갖출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토니상 후보(수상여부와 상관없이)라는 글로벌 상징의 의미는 단지 예술적 영예에 그치지 않는다. 브로드웨이의 토니상과 런던의 올리비에상은 세계 공연 유통시장에서 콘텐츠의 가치를 인증하는 신호로 기능한다. 이 상의 노미네이트만으로도 세계 각국의 프로듀서와 투자자, 극장들이 해당 작품에 대한 유통 가능성과 사업성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쩌면 해피엔딩>의 사례는 한국 뮤지컬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연극을 포함한 공연예술 전반에 “우리도 가능한가?”라는 자극을 주는 사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구조적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장르 간 위계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뮤지컬은 예술성이 부족하다는 편견 속에서도 국제무대에서 문학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으며 그 위상을 반전시켰다. 이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 짓던 문화예술 정책과 인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둘째, 창작의 분업화가 필수적이다. 현재 한국 연극계는 창작, 제작, 유통이 대부분 개인 또는 소규모 단체에 의해 수직 통합돼 있어 신작의 지속 가능성이 낮고, 결과적으로 해외 진출도 제한적이다. 반면 뮤지컬은 제작사, 배급사, 창작자 간 역할이 분리되어 있어 장기 유통과 스케일업이 가능하다.
셋째, 해외 진출 전략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문화교류는 단순한 초청 위주였지만, 이제는 공동 기획과 제작, 국제 유통을 고려한 전략적 진출이 요구된다. 이는 단발성이 아닌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정부가 논의 중인 ‘뮤지컬진흥법’과 ‘뮤지컬진흥위원회’는 영화진흥위원회 모델을 참조해 뮤지컬을 하나의 산업군으로 제도화하려는 시도다. 연극계 또한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진흥 산업’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적 재설계가 요구된다. 예술과 산업, 창작과 유통, 국내와 해외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새로운 정책 프레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문화외교 전략과 연계된 장기 로드맵 없이 연극의 세계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어쩌면 해피엔딩>의 성공은 단지 하나의 작품이나 장르의 쾌거가 아니다. 이것은 한국 공연예술 생태계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며, 연극계가 지금 어떤 준비와 전환을 시작해야 하는지를 묻는 결정적 순간이다. 세계로 향하는 뮤지컬의 발걸음이 연극에도 이어질 수 있을지, 지금이 바로 그 가능성을 설계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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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는 도구가 아니다” 영국 문화계의 연대 선언
“AI에게 우리의 창작권을 넘길 수 없다”는 외침이 영국 예술계를 관통하고 있다. 지난주, 앤드루 로이드 웨버, 캐머런 매킨토시, 니콜라스 하이트너, 이안 맥켈런을 비롯한 영국 대표 예술가 400여 명이 총리 키어 스타머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며, AI 시대의 저작권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 마련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들은 베이번 키드론 상원의원이 발의한 ‘Kidron 수정안’을 지지하며, 인공지능이 학습한 창작물 목록을 공개하도록 법제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서한은 상원에서 예정된 ‘데이터(사용 및 접근) 법안’ 표결을 앞두고 전달되었으며, 국립극장, 영국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 올드 빅 등 문화예술계 핵심 기관들이 함께했다.
영국 예술계의 주장은 명확하다. 영국이 창조산업의 강국으로 남기 위해서는 창작물의 무단 사용을 막고, 창작자가 AI 개발자와 대등한 협상 테이블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창작한 작품을 미국의 대형 AI 기술기업이 무상으로 가져가도록 방치한다면, 이는 수익 손실을 넘어 국가의 문화 주권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며, 창작자와 개발자가 지속 가능한 라이선스 체계를 함께 구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핵심 메시지다.
실제로 Kidron 수정안은 상원에서는 통과되었지만, 하원에서는 지난 5월 7일 보수당 주도로 287 대 88이라는 큰 표차로 부결되었다. 키드론 의원은 “AI 개발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지금 가장 중요하다”며, 다시 한번 정치권의 책임 있는 결단을 촉구했다. 그녀는 “창작산업은 단지 경제적 수치가 아닌 240만 개의 일자리를 떠받치고 있으며, 영국의 문화 정체성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이번 캠페인에는 톰 스토파드, 마틴 맥도너, 리처드 커티스, 루퍼트 굴드, 루시 커크우드, 이소벨 맥아더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와 연출가들이 참여했고, 새들러스 웰스, 글린드본, 오페라 노스, 국립발레단 등 주요 예술기관들도 함께했다. “AI가 인간의 창작을 학습할 수는 있지만, 창작 그 자체의 가치는 인간의 손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만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그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저작권 분쟁을 넘어 시대적 윤리와 문화적 주권에 대한 질문을 우리 모두에게 던진다.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 정부의 미온적 대응은 곧 창작자들의 권리 포기를 의미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원’이 아니라 ‘보호’이며, 선택이 아닌 의무다. 영국 예술가들은 묻고 있다. “이제, 정부는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ILOVESTAGE 김준영 프로듀서
junyoung.kim@ilovesta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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