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고 정치적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건립된 개선문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적, 시각적 랜드마크로 존재한다. 315년 완성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유럽에서 가장 명성 높은 개선문으로 통한다. |
|
‘로마로 통하는 관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문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가장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문은 기본적으로 ‘시작’과 ‘성공’이라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유럽 건축에서 문이 중요하게 여겨진 이유는 정치적·종교적 권위를 표현하고, 성공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최선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에는 시대별로 다양한 의미와 형태를 지닌 문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개선문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고 정치적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건립되었다. 이후 유럽 주요 도시에 남은 개선문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적, 시각적 랜드마크로 존재한다.
현재 유럽에는 200여 개의 개선문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가장 높은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315년에 완공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서로마를 통일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원로원이 만들어서 봉헌한 것이다.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과 팔라틴 언덕 사이에 건립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높이 21미터, 폭 25.7미터, 깊이 7.4미터이고, 가운데 중심 아치를 작은 두 개의 아치가 좌우에서 지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아치와 함께 각각 네 개의 코린트 양식의 화려한 기둥이 사용되었고, 기둥 위에는 조각상을 놓아서 권위를 표현했다. 그리고 아치의 벽면과 내부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업적과 전쟁 관련 부조를 섬세하게 새겨 넣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다른 유럽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개선문보다 크다고 할 수 없으며, 엄청난 규모와 장식으로 가득한 로마의 다른 건축물과 비교해서 두드러진다고 할 수도 없다. 특히, 바로 옆에 자리한 웅장한 모습의 콜로세움과 비교하면 소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통하는 상징적 관문으로 굳건히 자리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이후 유럽에서 건립된 수많은 개선문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파리의 중심에 우뚝 선’ 에투알 개선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건립된 이후 유럽에서는 수많은 개선문이 경쟁적으로 세워졌다. 아이러니지만 이는 곧 유럽이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견줄만한 개선문은 무려 1500년이 지나서야 등장했다. 주인공은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다.
파리 드골 광장에 건립된 에투알 개선문은 1805년에 나폴레옹 1세의 군대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연합군과 싸운 오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1836년에 완공되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마찬가지로 아치 구조를 사용했지만, 가운데 한 개의 커다란 아치가 있고, 측면으로 두 개의 작은 아치를 설치했다. 에투알 개선문은 무려 높이 49미터, 폭 45미터로 규모 면에서 비교하자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외부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승전 장면들이 정교하게 부조되었고, 내부는 현재 고문서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에투알 개선문은 그 자체의 상징성과 더불어서 도시계획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명쾌한 도시 구조를 갖고 있다. 에투알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방사형 도로가 퍼져나가고, 샹젤리제 방향으로 뻗은 축선 상에는 루브르 박물관이 놓여 있다. 처음에는 에투알 개선문을 중심으로 5개의 길로 뻗어나가도록 계획했지만, 1853년부터 17년 동안 파리 지사를 지내며 파리의 대개조를 담당했던 조르주 외젠 오스만에 의하여 12개로 확장되었다.
오스만은 파리에 합리적이고, 간결한 도시순환체계를 도입하고자 의도했다. 오스만에 의하여 새롭게 정비된 도시 구조 아래에 파리는 신도시인 라데팡스에서 루브르 박물관까지 연결되는 강력한 상징 거리를 갖게 되었다. 이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으로써, 바로 그 중심에 에투알 개선문이 우뚝 서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건립된 이후 유럽에서는 수많은 개선문이 경쟁적으로 세워졌다. 아이러니지만 이는 곧 유럽이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견줄만한 개선문은 무려 1500년이 지나서야 등장했다. 주인공은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다.
파리 드골 광장에 건립된 에투알 개선문은 1805년에 나폴레옹 1세의 군대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연합군과 싸운 오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1836년에 완공되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마찬가지로 아치 구조를 사용했지만, 가운데 한 개의 커다란 아치가 있고, 측면으로 두 개의 작은 아치를 설치했다. 에투알 개선문은 무려 높이 49미터, 폭 45미터로 규모 면에서 비교하자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외부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승전 장면들이 정교하게 부조되었고, 내부는 현재 고문서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에투알 개선문은 그 자체의 상징성과 더불어서 도시계획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명쾌한 도시 구조를 갖고 있다. 에투알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방사형 도로가 퍼져나가고, 샹젤리제 방향으로 뻗은 축선 상에는 루브르 박물관이 놓여 있다. 처음에는 에투알 개선문을 중심으로 5개의 길로 뻗어나가도록 계획했지만, 1853년부터 17년 동안 파리 지사를 지내며 파리의 대개조를 담당했던 조르주 외젠 오스만에 의하여 12개로 확장되었다.
오스만은 파리에 합리적이고, 간결한 도시순환체계를 도입하고자 의도했다. 오스만에 의하여 새롭게 정비된 도시 구조 아래에 파리는 신도시인 라데팡스에서 루브르 박물관까지 연결되는 강력한 상징 거리를 갖게 되었다. 이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으로써, 바로 그 중심에 에투알 개선문이 우뚝 서있다.
글쓴이 김 정 후
(건축가, 런던정경대학 튜터)
archtocity@chol.com저서 : <공간사옥>(공저, 2003)
<작가 정신이 빛나는 건축을 만나다>(2005)
<상상/하다, 채움의 문화>(공저, 2006)
<유럽건축 뒤집어보기>(2007)
<유럽의 발견>(2010 발간 예정)
활동 : 현재 디자인과 강의를 하며
도시계획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조선일보, SKY-HD와 다큐멘타리를 제작했고
KBS, SBS의 디자인 프로그램 자문을 맡고 있다.
ⓒ 코리안위클리(http://www.koweekly.co.uk),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