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릴 때
머리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그 하얀 눈송이를 맞으며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첫눈이 내릴 때
차가운 손 마주 잡고
눈물 글썽이며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첫눈이 내릴 때
함께 눈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좋아하는 것들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나의 시 ‘첫 눈이 내릴 때’ 전문>
오늘 한국에서 소포를 두 박스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책입니다. 얼마 전에 전화로 필요한 책이 없어서 하소연을 했더니 손수 서재에서 내게 필요한 책들을 골라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의 손 때가 묻은 책들을 만지며 잠시 감상에 젖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와글거리거나 집으로 돌아가기보다는 학교도서관에 들러서 책을 읽거나 아니면 책을 구경하는 것이 나의 취미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도서관이 작고 초라한 것이지만 당시 나에게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책들을 다 갖다 놓은 신비의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국내외 위인전, 왕자와 거지, 키다리 아저씨, 소공녀, 소공자, 빨강머리 앤, 삼총사 등의 책을 읽으며 책속의 주인공들과 어울리며 꿈을 키웠습니다.
어렵게 모아둔 돈을 몽땅 털어서 학교에서 판매하는 자유교양문고라는 책을 구입한 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집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은 기억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책 속으로 몰입할 수 있었던 온전한 시간의 흐름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책의 깊이와 감동보다는 책 읽는 순간이 주는 시간들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후로도 책은 여전히 나의 훌륭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아버지입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책을 읽는 분이셨습니다. 심지어는 출퇴근 길 흔들리는 시내버스 속에서도 책을 읽는 분이셨습니다. 넉넉하지 않는 살림에 책에 대한 투자는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와 약간의 마찰이 있기도 하셨지만, 그런 아버지 덕분인지 저는 자연스럽게 책과 가까워 질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속의 주인공은 다른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했고, 읽을 때마다 언제든지 다른 목소리로 나에게 대답을 해 줍니다.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지은이와 읽는 이가 끝없는 대화를 이어 가면서 인류의 유산인 지식을 키워 나갈 수 있음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책을 통한 만남은 일방적인 성격을 띠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책이란 것이 쓴 사람의 생각이나 뜻을 일방으로 읽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수단에 그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일 어떤 책이 일방으로 한 쪽 의견을 전달 또는 주입하고 만다면 역시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딱딱한 법조문으로 되어 있는 법전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도무지 이견(異見)을 용납하지 않고 의문제기를 사전 봉쇄하는 그런 책은 결코 좋은 책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무릇 책이란 전달수단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나아가서 대화와 창조의 수단이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잔소리가 길어졌습니다만, 나는 살아 있는 스승이나 친구들과 사귀는 일 못지 않게,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지만 그가 남긴 책을 통해 여전히 살아 숨쉬면서 말하고 울고 속삭이고 꾸짖고 노래하는 스승과 친구들을 사귀는 일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러한 책들이 없었다면 오늘 나의 모습은 사뭇 달라져 있되 아마도 훨씬 더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리 많이 읽지는 못합니다만, 그런 책을 읽을 수 있음에 대하여 그와 같은 유산을 물려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주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상에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단련된 내면을 이야기 할 때, 혹은 열정의 기원을 얘기할 때 책을 꼽습니다. 단지 성공이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짱짱한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독서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을 쉽게 단절하는 내면의 파워를 책에서 얻었다고 자랑합니다.
지금 이 순간 흔들리는 시내 버스 안에서, 또는 안방에 앉으셔셔 책을 읽으시는 아버지의 멋진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 두 그림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음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연민이나 지나친 감상 또는 삶의 엄살에 젖어 들려할 때 또는 깊은 나를 응시하고자 할 때 책은 더할 나위 없는 등대가 됩니다. 어설픈 가치관에 흔들릴 때 적당히 넘어가야 할 장벽 앞에 설 때도 책이 필요합니다.
‘인생엔 커피가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라는 카피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책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소소한 상처들을 녹이듯 온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커피 한 잔이 고마운 순간들이 있듯이 책 속에 담긴 뜨겁고도 냉철한 행간 사이의 감성과 이성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나도 책을 읽는 멋진 아버지이고 싶습니다.
- 김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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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혁님은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시인,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인간성으로서의 하나님>, 시집 <작은 꽃 한송이 되고 싶구나>,
<그대가 되고 싶습니다>, <기쁨아 너를 부르면 슬픔이 왜 앞서 오느냐>,
<다시 사랑하고 싶다>와 칼럼집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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