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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물과 백두산이… ②안익태 선생의 인생과 발자취
코리안위클리  2004/05/20, 04:12:37   
미국에 도착한 안선생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를 먼저 찾았고 일제의 억압 속에 신음하고 있는 조국을 멀리하고 이역땅에 와 국기 게양대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처음 보았을 때 실로 벅차오르는 감격은 말을 잊게 했다.
특히 한인교회에서 예배가 끝난 후에 부르는 애국가를 듣고 나서 애국가의 가사를 잘 베껴서 소중히 보관한 후 신시내티로 향했다.
신시내티에 도착한 안선생은 음악대학에 입학해서 더욱 깊이있는 음악예술에 몰입하게 되었고 2학년이 되어서는 신시내티 시립관현악단의 첼로 주자로 입단하는 한편, 미국에서 처음으로 순회 독주회를 개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평을 보면 “안씨가 연주한 첼로의 ‘D단조협주곡’은 놀랄만한 기교와 세련된 소리를 가지고 청중을 도취시켰다”라고 썼다. 그러나 성공적인 순회연주를 마치면서도 안선생은 아무래도 첼로로 대성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던지 선배인 박윤정씨와 의논 끝에 그의 도움으로 이번에는 템플대학교의 단과대학인 필라델피아음악대학으로 편입해서 작곡과 지휘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처럼 지휘공부에 박차를 가하면서 또 다시 작곡 공부를 위해 ‘커티스’ 음악 학교에 적을 두게 되었고 시카고 교향악단을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끌어올린 불멸의 지휘자 ‘프리곤 라이어’로부터 작곡을 사사받게 되었다. 이 두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를 완전한 음악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고 훗날 그의 음악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1935년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을 졸업한 안선생은 계속해서 창작에 힘을 썼다. 하숙비가 없어 하숙집에서 쫓겨나면서도 뉴욕교향악단이 주최하는 작곡 콩쿠르에 응모하기 위한 <한국환상곡>의 작곡에 착수했다. <한국환상곡>은 후에 애국가의 선율에 합창을 붙여 마지막 악장에 삽입했고 동양적인 신비와 우리 고유의 가락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세계 도처에서 연주되었고 한국의 얼을 심어준 명곡이 되었다.
어쨌든 콩쿠르에 참가해 이 곡이 카네기홀에서 연주되던 날 그는 설레이는 마음과 부푼 가슴을 안고 지휘대에 서서 힘껏 손을 흔들었으나 한국인이라고 업신여겼던지 혹은 미국인을 콩쿠르에 입상시키고 싶었던지 단원들은 불성실한 연주를 했고 참다 못한 안선생은 연주도중에 퇴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한국환상곡>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성장했고 1939년부터 48년 사이에만도 15회 이상의 연주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곡에 대한 그의 애착을 짐작할 만 하다. 미국의 악단에 실망한 안선생은 고전음악의 본 고장인 유럽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 결국은 1936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안선생은 당시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일본의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자 불현듯 조국에 대한 애착심과 애국가를 작곡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6년전 미국에서 적어둔 가사를 펴놓고 감격 속에서 애국가의 선율을 완성하니 1936년 6월은 우리의 ‘애국가’가 이역만리 독일에서 그것도 히틀러의 독재하에서 탄생한 역사적인 해가 되었다.
애국가를 작곡한 그해 8월 1일 베를린에서는 올림픽이 열렸다. 바로 이 올림픽에는 비록 일장기를 달기는 했지만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를 비롯한 7명의 한국선수가 참가하고 있었다.
안선생은 입장식이 끝나자 이들을 찾아가 애국가의 악보를 내놓고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응원가라고 하며 함께 부르니 우리의 애국가가 불리워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애국가를 완성한 안선생은 사본을 만들어 미국에 있는 교민회에 보냈고 <한국환상곡>의 종악장에 합창으로 애국가의 선율을 삽입해 드디어 <한국환상곡>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부터 그의 활동은 유럽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는데 당시의 스승으로는 지휘자 ‘바인가르트너’와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코다이’와 ‘도흐나니’ 등이 있다. 민족의 혼이 담긴 <한국환상곡>을 미국에서 연주하다 실패한 안선생은 드디어 1938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감격적인 초연을 하게 되었고, 더욱이 합창 부분의 가사를 한국말 그대로 부르게 했으니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후에도 계속되어 어디를 가나 합창은 반드시 한국말로 하도록 했던 것이다.
초연을 성공리에 끝낸 안선생은 당시 세계 최대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에게 사사 받기 위해 다시 독일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쉬트라우스’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쉬트라우스’의 뒷받침으로 지휘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반드시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 조국은 일제의 압제 하에 있었으나 애국가는 계속해서 세계 도처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안선생은 독일을 떠나 친지의 소개로 스페인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스페인에서 그곳 귀족의 딸인 롤리타양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안선생의 나이 41세였다.
가정을 꾸민 안선생은 안식처를 찾아 지중해의 연안에 있는 피서지 마요르카에 안착했고 마요르카에서는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 선생을 맞아 마요르카 교향악단이 창단되니 1941년 창단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상임지휘자로 있었다.
1955년 조국을 떠난 지 25년만에 귀국해서 이승만박사 탄생 80주년 기념연주를 지휘했으나 그를 시기하는 일부 인사들의 모함으로 슬픈 가슴을 안고 한국을 떠났고 5·16 후인 1961년 다시 귀국 국제음악제를 창설, 2회까지 지휘봉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말버릇처럼 조국에서 살겠다는 그의 염원도 아랑곳없이 조국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고 그가 설 땅은 없었다.
1965년 안선생은 영국의 뉴필하모니아 교향악단을 지휘하기 위해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영국에 건너가 자신의 작품인 <논개>와 <비창> 교향곡을 성공리에 지휘했으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급히 마요르카로 돌아왔으나 병세는 끝내 호전되지 않아 1965년 9월 16일 쓸쓸히 눈을 감았으니 그의 나이 59세였다.
<다음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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