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을 가진 탐정, 셜록 홈스. 어린이용 문고판을 읽고 자란 세대라면 삽화로 나온 홈스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냥모자, 구부러진 파이프, 돋보기…. 셜록 홈스를 떠올리게 하는 코드는 많지만 실존 인물도 아닌 그를 진지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상상력이란 공간 외에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쉽게 홈스를 만날 수 있도록 박물관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박물관에서 출발, 홈스의 궤적을 더듬는 런던 시티투어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런던에서 홈스와 함께 거리를 걷다보면 마치 그가 실존했던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2월의 차갑고 흐린 런던 날씨만 기억하는 냉소적인 여행자들에게도 홈스식 문학기행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19세기의 대중스타, 셜록 홈스
셜록 홈스의 작가, 아서 코넌 도일(1859∼1930)은 에든버러 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상상력이 풍부했던 그는 학우들 사이에서 입심 좋은 이야기꾼으로 유명했다. 새로 학기가 시작되면 가상의 인물을 창조,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 인물이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모험담을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로는 에드거 앨런 포와 에밀 가보리오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셜록 홈스’라는 독특한 인물은 그가 다니던 에든버러 의과대학의 교수, 조지프 벨이 모델이었다고 한다. 깡마른 몸에 쏘는 듯한 회색 눈, 좁다란 매부리코가 홈스의 이미지와 흡사한 벨 교수는 종종 예리한 관찰력과 추리력으로 예비 의사들을 놀려주던 괴짜였다. 일례로 강의 중에 학생들에게 쓴 약물을 맛보게 했는데, 먼저 시범을 보여 모든 학생들이 따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맛을 본 후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그는 익살맞은 웃음으로 자신이 두 번째 손가락에 약물을 묻히고 실제로 혀에 댄 것은 세 번째 손가락이었다고 밝혔다. 홈스가 친구인 의사 왓슨에게 관찰력에 관해 주의를 주는 장면이 연상된다.
아무튼 진료도 하기 전에 환자의 병력과 직업, 성격 등을 정확하게 알아맞히던 이 교수에 관한 강한 기억을 되살려 코넌 도일은 홈스라는 탐정을 만들어냈다. 그때가 1887년. 첫 번째 홈스 이야기는 <주홍색 연구>란 제목으로 단돈 25파운드에 원고를 넘겼다고 한다. 그 후 <스트랜드(Strand)>라는 잡지에 연재된 단편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덕분에 코난 도일은 부와 명성을 얻었다.
탐정 홈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19세기로 산업혁명이 완성되면서 세계 최초의 지하철과 우편제도, 의무교육이 실시된 때였다. 도시 중산층이 생겨난 것도 이즈음. 교육 받은 이들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문학 작품과 장르가 나왔으며, 이때 홈스 시리즈가 잡지에 연재된 것이다. 게다가 삽화가 시드니 파젯이 홈스를 그려냄으로써 사람들은 탐정 홈스를 더욱 구체적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나 코넌 도일은 대중적인 스타일의 추리소설 작가보다 깊이 있는 역사소설 작가로 기억되길 원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홈스에 싫증을 느껴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결과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런던 시내에는 검은 상장을 단 사람들이 등장했고 항의 편지가 쇄도했다. 출판업자들은 작가를 돈으로 매수하려 했고 심지어 협박까지 했다. 하지만 코넌 도일은 자신이 홈스를 ‘과다복용’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물론 그 시기가 오래 가지 않아 홈스는 당당히 ‘귀환’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지금, 런던은 홈스를 이용한 문학기행 시티투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유품(?) 만나는 공간, 박물관
홈스는 정확히 237번지와 239번지 사이에 있는 베이커거리 221b번지에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이곳에는 셜록 홈스의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관광객들은 홈스의 가정부의 환대를 받으며 2층에 재현된 그의 방을 구경할 수 있다. 박물관은 2층부터 4층까지로 5층엔 작은 다락방도 있다.
우선, 2층은 셜록 홈스의 침실과 응접실. 침실은 홈스 시리즈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원작에 묘사된 모습을 충실히 그려냈음을 알 수 있다. 홈스가 사용하던 실험도구나 철학책 등이 놓여 있고 당시의 의료기구가 들어 있는 왓슨의 왕진가방도 눈에 띈다. 3층은 닥터 왓슨의 방과 허드슨 부인의 방으로 이곳에선 전부 24개의 밀랍인형을 만날 수 있다. 소설에 따르면 홈스와 닥터 왓슨은 무려 25년간이나 이 집에서 살았다. 연도로 따지면 1881년부터 1904년까지로 빅토리아 시대였다. 고증을 거쳐 당시의 의상을 밀랍인형들에게 입혔음은 물론,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도 소설 속에 묘사된 대로 17개로 맞춰놓았다. 박물관 안내 팸플릿에는 그런 장면들이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1층 입구 옆에는 별도의 기념품 숍이 있어 소설의 복사본과 사냥꾼 모자 등 홈스의 소품들을 구입할 수 있다. 셜록 홈스가 즐겨 피우던 담배와 파이프, 소설을 영화화한 비디오테이프까지 홈스를 주제로 상품이 된 모든 기념품을 만날 수 있다.
박물관이 있는 베이커거리 221번지는 셜록 홈스가 발표된 1887년에는 없던 번지였다. 가공의 주소였던 이곳은 베이커거리가 확장되면서 실제로 221b번지가 생김으로써 현실이 돼 버렸다.
그 덕분에 221b번지의 입주한 사무실들은 매일 수신인이 ‘셜록 홈스’인 편지들 때문에 고역을 치렀다. 그 중 한 곳은 아예 전담직원을 두고 답장을 해주는 서비스까지 했다.
1987년 ‘셜록 홈스 출간 100주년’이 되었을 때, 이곳을 중심으로 축제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셜록 홈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건물주는 고민 끝에 홈스의 팬들을 위해 건물을 박물관으로 개조할 것을 결정했다. 박물관 옆에는 셜록 홈스와 관련된 가게들이 많고 박물관 근처의 베이커 역 구내에도 셜록 홈스의 일러스트와 베이커 스트리트를 타일로 디자인해 놓아 그야말로 베이커 스트리트는 홈스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두 걸음도 옮길 수 없을 정도이다.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다는 영국식 박물관 마케팅 기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홈스의 초대를 받은 사람처럼 2층 접견실에서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 재미있는 홈스 박물관. 이색 런던 여행의 출발점이다.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