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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3 ‘전원적 잉글랜드’
코리안위클리  2008/11/06, 01:10:49   
▲ 컨스터블이 1812년에 그린 <건초 수레>는 영국인들로 하여금 “잉글랜드의 녹지와 기분 좋은 대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의 애정을 묘사한 전형적인 그림”으로 정의되었다.
“잉글랜드는 시골이고 시골이야말로 잉글랜드”
영국인들의 시골을 향한 끈질긴 동경


19세기 영국인들이 ‘영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의회’나 ‘런던’ 또는 ‘제국’이라고 답한 데 반해, 1912년 발표된 어느 글은 “이 녹색 들판, 이 언덕과 계곡, 이 관목과 과일나무들, 이 부드러운 풍광”이야말로 사람들이 사랑하는 잉글랜드라고 확신한다.
영국인들처럼 풍경을 소중한 유산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없다. 유적보호운동, 자연보호 운동, 고건물복구 운동 등이 모두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게다가 풍경은 단순히 풍경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국가적 가치관’의 표징으로 간주되는데, 예를 들어 영국인들은 자기 나라의 풍경이 ‘자유’를 연상시킨다고 주장한다.
시골을 향한 이상하고도 끈질긴 동경을 빼놓고는 잉글랜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시골은 모든 면에서 산업사회가 아닌 것, 즉 오래되고 천천히 움직이고 안정되고 안락한 ‘영적인’사회로 인식되었다. 신분 간의 위계질서가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불평등하지만 신뢰와 의무와 사랑이 담겨 있는 그 이상적인 사회에서, 예컨대 신사와 오막살이 농부는 ‘역사와 자연의 부드러운 품’에 안겨 함께 행복을 누린다. 이러한 전원적 이상은 분명 현실의 영국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지만. 영국인들은 한동안 그러한 시골의 신화에 안주하여 위안을 찾았다.

잉글랜드의 마을은 위대한 성인의 유물과 같다.
지붕과 담장은 들판과 나무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여관과 사거리와 시장의 자연스러움은 왕관에 박힌 보석과 같이
매우 고귀하다. 이것들이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국민적이고, 정상적이고, 잉글랜드적인 것들이다.  - 체스터틴G.K. Chesterton -


회화 예술에서 풍경화는 영국에서 특히 1790~1840년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특히 컨스터블이 이전 풍경화의 인위적인 측면들을 버리고 진정한 의미의 자연주의로 돌아섰을 때 비로소 영국 풍경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명한 장소나 풍경, 혹은 유적지가 아니라 시골길, 농지, 하천 풍경을 전형적인 특징으로 하는 잉글랜드 농촌을 그림으로써 영국 풍경화의 기초를 닦았다.
자연에 대한 시대정신을 대변한 또 한명의 화가는 터너였다. 터너는 14세부터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그가 그린 잉글랜드 풍경화는 컨스터블의 풍경화보다 훨씬 덜 알려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까지도 아름다운 잉글랜드 풍경이란 개념의 선례가 된 것은 ‘가정적이고 사랑스러운’ 풍경을 그린 컨스터블이 아니라 극적인 바다와 산으로 산업적 영국의 힘을 표현한 터너가 국민화가로 인식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컨스터블이 ‘잉글랜드적 풍경의 아버지’로 재추앙되었고 1930년대에 이르러 잉글랜드의 아름다움을 다루는 책들은 거의 대부분 컨스터블 유의 시골 풍경으로 구성되었다.
19세기 후반 산업화와 도시화가 절정에 이르면서 사람들은 현실이 보여주는 잉글랜드적인 것에 실망하여 그와 대조되는 이상적인 잉글랜드를 시골과 전원에서 찾았다. 시골 풍경은 긍정적이고 고귀한 자질들의 집합체로 보였고 잉글랜드적인 것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것의 반영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전원에서 ‘진정한 잉글랜드’를 찾고자 했다.

전원적 잉글랜드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지만 분명 현실을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초에 역사학자 마틴 위너Martin Wiener는 영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자본가들을 가진 나라인데도 그들을 합당한 존경심으로 대하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도 자기확신과 자부심이 부족했다. 그 결과 산업적 에너지가 마모되고 중간계급이 지주화 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야기했다.
전원적 잉글랜드가 내포하는 문제는 잉글랜드, 그것도 ‘남부 잉글랜드’라는 특정 지역의 이미지를 국가 전체에 투영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영국 역사 곳곳에 건재한 ‘잉글랜드 중심주의’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컨스터블의 <건초 수레>에 묘사된 ‘컨스터블 지방’은 남부 지방이 잉글랜드의 핵심임을 웅변하며 그가 그린 나른하고 안락한 시골 풍경은 ‘영국’적인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것이다.
그렇다면 스코틀랜드인이나 웨일스인들은 ‘전원적 잉글랜드’라는 국민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들 역시 전원적 버전을 예찬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원적 잉글랜드’라 할 때 그들이 염두에 둔 것은 단지 잉글랜드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골은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에 널리 퍼져 있었다. 게다가 남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북부의 시골도 영국적인 것으로 찬양되었으며 남부가 상징하는 나무 울타리와 오두막뿐만 아니라 북부의 산과 황무지도 국가를 찬양하는 데 동원되었다.
19세기 후반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세계의 공장이 될 것인가, 아니면 기분 좋은 녹색의 땅이 될 것인가를 자문하고는 후자를 선택했다. 전원적 이상의 근저에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상실을 상상 속에서 회복하려는 욕구가 깔려 있었다. 즉 농촌의 많은 부분이 사라져 버리고 변화하는 바로 그때 농촌이 소박하고 안정적이며 탈역사적인 이미지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세계 최초의 산업국이면서도 산업 발전을 영감의 원천으로 생각한 적이 거의 없는 영국인들은 ‘전원적 잉글랜드’의 이미지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전원적인 녹색의 잉글랜드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정치적 함의를 내포했다.
그 핵심은 ‘지속’, ‘공동체’, 또는 ‘조화’의 이상이었고 무엇보다도 ‘계급 없는 사회’라는 특별한 종류의 이상이었다. 영국인들은 전원적 이미지에서 ‘진정한 잉글랜드’를 찾으려 했다.
그곳은 공기가 맑고 인간관계가 여전히 개인적이고 자연스러우며 범죄와 폭력이 없다. 즉 사람들은 비자연적 또는 비현실적인 도시사회에 대조되는 진정한 사회, 유기체 사회의 존재를 믿고 싶어했던 것이다. 전원적 이미지는 영국인들의 섬나라 근성과 더불어 안정과 질서에 바쳐진 자기인식에도 어울린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농촌은 국민 정체성의 상징으로 쓰이기에 너무나 쇠락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원적 잉글랜드’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향수로 작용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많이 파괴될수록 더 많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땅이고 자연이기 때문이다.


필자 박지향(朴枝香) 교수는
195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1978),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유럽사학 1985), 영국사학회 연구이사
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저서: ‘영국사’‘제국주의’‘슬픈 아일랜드’‘일그러진 근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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