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무늬의 B.I를 선보일 때 늘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려는 <코리안위클리>의 노력과 의지를 새삼 확인했다. 혹자는 어차피 한계가 뻔한 인터넷 신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교민지가 그렇게 한들 무슨 시너지 효과가 있겠냐고 물을지도 모르나 그렇게라도 한번 더 시큰둥해지면서 한번 더 각인되는 효과가 바로 시너지다. <코리안위클리>는 그걸 알고 있었을 터이고 우리 한인들은 빠른 시간 내에 그 물결무늬에 길들여질 듯 하다.
창간 600호가 이미 훌쩍 지났는데 이제야 창간 600호 축하글을 보낸다는 것이 신문의 속보성에도 맞지 않을 듯 하다는 나의 억지 반론에도 불구하고 위클리의 편집진은 마치 600호의 영광을 곱씹듯 무관하다 했다. 이제 50호가 갓 넘은 나로서는 그것조차 여유로 보였다.
말이 600호지 무가지 600호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몇백호의 초기 희생을 염두에 두고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경제적 산술만이 아니라 재영 한인사회의 토양을 <코리안위클리>가 태어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짚어보면 언발에 오줌누기의 유지상태도 벅찼으리라 짐작된다.
근대신문이 생겨나기 전 중세 유럽의 소식지 형태 신문들은 무역하는 상인이나 학생 또는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군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외국소식을 실었다 한다. 그 정도야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지역소식을 실으려면 발품을 꽤나 팔았지 않겠는가. 실컷 웃고나서 ‘유치한 개그맨들 같으니…’라고 욕하는 것과 꼭 같은 ‘이정도야 나도 만들겠다’라는 주고 욕먹는 자승자박속에 말이다.
그렇지만 <코리안위클리>는 이걸 뚫고나온 묘책이 하나 돋보인다. 신문이 전달하는 정보는 그 신문의 편집자에 의해 선택된 정보다. 모든 정보를 다 실을 수 없다는 뜻도 되지만 그 신문의 성격과 편집방향에 따라 모두의 구미를 맞출 수는 없다는 뜻도 된다. 그렇게 선택된 정보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것도 다반사다. 대인간의 접촉에서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이야 개인별로 맞추면 되는데 다중을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개개인 별로 좋고 나쁨의 다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점에 있어 이 신문은 한인사회의 좁은 규모 속에서 가장 적절한 중간자리를 늘 잘 찾는 것으로 비켜났다. 널뛰기의 중간에 앉은 초동처럼….
난 그점을 객관성의 유지라고 긍정적인 측면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알 수 있을까. 언젠가 있었던 코리안위클리 사장의 신세한탄은 “소 잡을 사람은 손에 피도 안묻히면서 우리더러 칼 잡으라고 한다”였다. 철저히 광고지로 갈 수도 없고 내 속이나 편하자는 식의 화풀이도 할 수 없는데, 이를 유, 무형의 아군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은 자꾸 생겨나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그 첫 정신이 갖고있는 무기를 우리가 갈고 닦아 줄 수 밖에는….
신문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편집자는 행복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어린 눈길이 두렵기 때문이며 그것이 행복일 듯 하다.
그래서 600호의 <코리안위클리>는 행복해 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