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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수당이 300년 이상 살아남은 이유는
코리안위클리  2011/10/13, 22:53:25   
▲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보수당 당수가 지난해 5월 7일 런던에서 총선 후 기자회견을 갖기 위해 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보수당은 이번 총선에서 제1당으로 롤백했다.
변해가는 시대와 유권자의 요구에 맞춰 자신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신념이나 정책을
과감히 버리거나 변형시킨 것이 영국 보수당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이다.

현재 영국은 보수당이 정권을 잡고 있다. 비록 하원의석 과반수 325석에서 19석이 모자라 자민당과 연정을 하고 있긴 하지만 현 영국 정부는 누가 뭐래도 보수당의 정권이다. 300년 이상 존재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인 보수당은 한국에서 가장 더러운 말로 치부되는 ‘가진 자들만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됐다. 글로는 신과 국가와 왕을 보호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귀족과 국교인 성공회와 부자들의 이익과 권익을 위해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800년 전인 1214년에 발표되어 인간의 권리에 관한 가장 위대한 문서라 일컬어지는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 나오는 인간의 권리도 사실 귀족과 부자의 권리를 말할 뿐이다. 존 왕의 실정을 빌미로 들고일어난 귀족과 부자들에 떠밀려 할 수 없이 왕이 내놓은 양보의 결과다.
이처럼 영국의 가진 자들은 왕과 평민 사이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대변하기 위해 보수당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영국에서 보수당은 가진 자와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보호하고 있다고 매도되지는 않는다. 보수당은 원죄를 벗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런 노력이 성공해 오랜 기간 살아남았다. 생존만 한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집권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보수당이 기득권층만의 이익을 대변했다면 결코 이렇게 오랜 기간 존재할 수도, 집권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는 유연성

보수당이 시대를 번갈아 가면서 새롭게 집권할 수 있었던 비결은 때가 되면 유권자들에게 ‘새로운 보수당’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영국인이야 원래 골동품 좋아하고 200~300년 된 집도 아무렇지 않게 고쳐가면서 살고, 오래된 집일수록 자랑스러워 하고 집값이 더 비싼 것이 사실이다. 농담으로도 영국인은 ‘악마라 해도 낯익은 악마에게 더 마음이 간다(prefer stick with the devil they know)’고 할 정도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는 보수당이 그렇게 오랜 세월 영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보수당을 가장 잘 묘사한 것으로 보수이론가 마이클 오크쇼트(Michael Oakeshott)가 말한 “영국 보수주의는 신념도 정책도 아니다. 그냥 하나의 성향에 지나지 않는다(England Toryism is not a creed or a doctrine but a disposition)”를 꼽을 수 있다. 이 말은 2005년 보수당이 아직 야당이고 집권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절 언론인 제프리 위트크로프트(Geoffrey Wheatcroft)가 쓴 책 ‘영국 보수당의 이상한 죽음(The Strange Death of Tory England)’에 나온다.
‘보수 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영국 보수당의 역사’의 저자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도 “가진 자의 정치적 생존의 기술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 경험이나 상식 등 현실적 체험과 관찰에 의해 형성된 사고방식, 감정의 양태, 생활양식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은 의미가 있다”는 말을 했다.
결국 보수당은 보수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적으로부터도 이론을 빌려 오고 ‘적과의 동침’(현재 자민당과의 연정을 들 수 있다. 사실 자민당은 현재 가까운 시일 내 단독 정권 쟁취가 난망한 실정이지만 1920년 이전만 해도 보수당과 같이 영국 정치를 양분한 정당이었다)도 불사하는 유연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성공 취해 변신 게을리하다 실권

45세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새로운 보수당의 상징이다. 옥스퍼드대학을 나와 하원 의원이 된 지 단 4년 만에 총리가 된 그가 내건 기치는 ‘진보적 보수주의(Progressive Conservative)’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를 조합해 교묘한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건 것이다.
이런 예는 보수당에서는 새로운 게 아니다. 그동안 보수당 지지자들의 입맛에는 전혀 맞지 않는 선거권 확대, 빈민주택, 건강보험과 같이 타 당의 정책도 필요하다면 선택해 살아남았다. 그런 정책 변화가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돌이켜보면 보수당의 유연성이 얼마나 현명한 판단이었는지 증명된다. 변해가는 시대와 유권자의 요구에 맞춰 자신들이 믿고 구현하고자 하는 신념이나 정책을 과감히 버리거나 변형시킨 것이 영국 보수당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이다.
그래서 정치학자들에 의해 영국 보수당은 ‘권력 장악을 위해서는 일관된 이념이나 신념 유지라는 순수성보다는 실용성으로 당내외 지지자를 설득하고 그를 바탕으로 부단히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은 과거의 보수당이 아니라 새로 태어났다는 이미지 변신을 잘하는 ‘카멜레온 같은 정당’이란 조롱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신을 게을리하고 자신들이 믿는 바에만 몰두할 때 보수당은 정권을 잃었다. 1979년 이후 4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이겨 18년간 집권하다 실권한 것도 자신의 성공에 취해버렸기 때문이다. 보수당이 옳다고 믿는 것이 국민에게도 옳다는 식의 착각에 빠져버린 것이다. 집의 크기나 소득에 관계없이 인구수에 의해 재산세를 부과하는 등 어떻게 보면 아주 합리적인 정책을 내놓았지만 유권자들은 외면했다.
그 결과 ‘영국병’을 치유한 대처 총리가 임기 중에 물러나고 존 메이저가 보수당 의원총회에서 당수로 선출되어 총리로 취임했다. 하지만 결국 보수당은 존 메이저 총리 시절 재집권에 실패하게 된다.

2010년 보수당의 부활

국민이 보수당의 장기 집권에 피로를 느낄 때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신 노동당(New Labour)’이라는 기치를 들고나와 집권에 성공했다. 당시 블레어 정권이 내건 정책을 일컫는 ‘제3의 길’은 사실 보수당 정책을 빌려와 교묘하게 노동당 방식으로 재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보수당이 과거 노동당 정권이 저지른 실정을 앞에 내세워 비난하자 노동당은 이제 과거의 노동당이 아니고 새 노동당이라는 것을 강조해 불안해하는 유권자를 안심시켰다. 자신이 집권하더라도 결코 실패로 끝난 기간산업 국유화나 노동조합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유권자들에게 다짐했고, 과거 노동당 정권의 일관된 정책이었던 무조건적인 증세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 결과 대처 정부 시절 성장한 중산층의 지지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기존 노동당의 금과옥조 같은 정책을 모두 버리고 과거와 거리를 둔 것이 집권의 열쇠였다. 결국 노동당도 유연성을 발휘하고서야 집권을 하게 된 것이다.
노동당이 이렇게 나오자 당시 보수당은 상당히 당황했고 실권을 한 이후 상당 기간 노동당에 의해 ‘탈취된’ 자신들의 정책을 어떻게 되찾아오는가로 고심했다. 당시 야당이던 보수당을 제프리 위트크로프트는 그의 책에서 “보수당은 오랜 기간 가만히 앉아서 독백하길 ‘우린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정권을 잡을 것이다’라고만 하고 있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대로 대지도 못하면서”라고 비웃었다.
그는 또한 “어떤 역사적인 법칙도 한 정당이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은 없다. 1960년에 자유당은 역사상 가장 큰 득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10년 뒤에는 거의 존재도 없어져버렸고 그 후에는 한 번도 정권에 가까이 가 본 적이 없다. 보수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을지는 과거의 그런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능력과 겸손에 달려 있다”고 준엄하게 타일렀다.
그로부터 딱 5년 뒤 보수당은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났다. 2010년의 보수당 부활을 보면 흡사 노동당 토니 블레어가 집권하던 1997년으로 역사가 다시 돌아간 듯하다. 그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젊고 잘생긴 정치인의 깜짝 등장과 함께 적으로부터 빼앗아온 정책을 새로 포장해 들고나오는 등 ‘기시감’을 느낄 정도다. 토니 블레어의 ‘신 노동당’을 데이비드 캐머런은 ‘진보적 보수당’으로 바꾼 것뿐이다.

‘보수의 정체성’ 보다 국민 위한 정책

정당이란 집권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이뤄가는 것이 존재 이유고 최고의 선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국 정당들이 오랜 신념을 버리고 시대에 유연히 대처하고 부단히 변신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꾸고 있다고 비난할 수만도 없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이 주장한 ‘흑묘백묘론’처럼 정치란 자신들의 신념을 현실 정치에서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국민이 잘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선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나라를 흔드는 갑작스러운 개혁을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영국 정치의 기본이다. 필요하다면 적으로부터도 정책을 배워와 자신의 노선을 수정하는 중도적 노선 견지와 이해 당사자 간의 충분한 협의와 토의를 거친 후 정책이 시행되는 점진적인 개혁이 영국 보수·노동 양당이 당내외 지지자들 사이에서 배반자란 소리를 들어오면서까지 지켜온 기본 방향이다.
영국인은 언론에서 호들갑을 떠는 정치인의 부패·섹스 스캔들, 경제 난국, 정책 실패 등으로만 자신의 정당을 잘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축구 클럽을 한번 정하면 아무리 그 클럽의 성적이 좋지 않아도 바꾸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한두 번 자신을 실망시켜도 쉽사리 지지 정당을 바꾸지 않는다. 영국인에게 있어 정당은 자신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다. 입은 옷과 타고 다니는 차와 사는 아파트를 통해 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운동을 좋아하느냐, 어느 축구 클럽을 좋아하느냐,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를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한다.
이처럼 영국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정당 내 일부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지도자가 정하면 거기에 지지를 표한다. 보수당의 지지율은 1935년의 49.7%를 정점으로 계속 하락 해서 18년의 장기 집권 후 실권하는 1997년 30.7%까지 하락했다. 하지만 이 최저점 이후로는 계속 상승세다.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이 오랫동안 집권을 하다 실권하는 과정이나 실권 상태였다가 다시 집권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자신들이 옳다고 비인기 정책을 밀어붙이면 실권하고, 오래 지켜온 신념이라도 시대와 유권자의 변화에 부응해 과감하고 유연하게 버리거나 고치면 집권한다. 유권자는 무엇이 각 당의 원칙이고 신념인지 알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이 좋아하는 정책을 제시하는 당에 표를 던질 뿐이다.
특히 부동층 유권자들은 더욱 그런 것에 민감하다. 부동표를 잡기 위해 지도자는 당내외의 반발에 인내를 가지고 설득하고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당을 수술해서라도 집권에 성공하는 것이다.

변신과 유연함을 배워라!

이러한 유연함과 현실감각이 한국 정치가 영국 정치에서 배워야 할 점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우리나라 지식인의 보수주의에 대한 성향을 조사하던 중 어느 블로그의 보수주의에 대한 글 시작이 ‘옛것을 지킨다는 것은 매력적이지도, 강력한 인상을 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우리에게 있어 보수주의란 반공을 빌미로 하여 기득권, 재벌, 외판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유신독재, 군사정권과 생태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구(舊)의 상징으로 치부돼 왔다. 그래서 보수주의의 정책을 지향하면서도 자신의 입으로 보수주의자라고 자칭하지 않는다. 보수가 이렇게 취급을 받는 가장 큰 책임은 보수 자신에 있다.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고 고집만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라고 해서 변하지 않고 그냥 옛것만을 고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단한 변신과 유연한 사고가 한국 보수가 해야 할 과제인 것 같다.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 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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