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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앞에서 만난 죽마고우 한소위 - 채우병 상록회 회장
코리안위클리  2003/06/19, 01:27:05   
꿈에도 저주스런 6·25 동족 상잔.
말로만 듣고 잊어가는 지금 세대들은 그 엄청난 민족 비극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다시는 조국의 이와 같은 비극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기원하며 당시 비극의 일화 한 토막을 회상해 보며 타인 혹은 본인의 판단 착오로 귀중한 목숨을 버린 희생자들에게 6월을 맞이하여 기리는 마음 간절할 따름이다.



돌연 북으로부터 남침을 당한 그 당시, 6·25전쟁의 총 지휘 사령탑인 육군본부가 서울에서 불가피하게 대구로 후퇴, 그곳 대구의 공평동 일대는 민간인 보다 군인이 더 많았고 졸병보다 장교가 더 많이 보행하고 있었다. 혹 졸병이 이 근처를 보행하려면 오른손이 피로할 정도로 손을 올려야 했다. 전쟁터에서 화약 냄새가 베인 전투복 차림의 졸병인 당시 나는 살벌한 헌병순찰과 전방군인보다 잘 다듬어 입은 군복차림의 고급장교들, 요란하게 사이렌소리를 내며 별판을 단 장군차를 인도하는 헌병 백차 사이에서 마치 거지 시골 소년이 처음 번화한 서울에 와서 당황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고 돌아서려 할 때 한 장교가 앞에서 걸어와 부딪혔다. 급히 거수경례를 하고 마주치는 순간 “야… 너…” 무의식 중에 터져 나오는 소리에 답례를 하던 그 장교도 “얼라… 야… 야…” 나보다 더 놀라며 그대로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달려와 껴 앉았다.

가정환경 다른 세 죽마고우
한재은과 나 그리고 이상직 우리 셋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중학으로 진학, 늘 같이 붙어 다니던 단짝이었다. 이상직은 태권도 2단의 힘깨나 쓰는 소위 그 당시 우리학교 대장으로 성장, 타교생과 싸움이 붙으면 앞장서서 처리하는 싸움꾼이었으며 한재은은 개그맨과 같은 소질이 있어 남을 잘 웃기는 재주가 있다 보니 응원을 담당, 전교 응원 단장이고 평범한 나는 이 개성이 강한 두 친구를 잘 조정하는 명수로 학도 호국단의 중책을 담당했었다. 사이 좋게 지내는 우리들에게 주위 친구들은 삼총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기숙사 뒷 편에서 숨어 담배 피우는 장난을 하다 훈육선생에게 발각되어 1주일 정학처분을 받고서 곧바로 병으로 휴학중인 안면도 부잣집 아들 선배의 집으로 찾아가 그 부친이 경영하는 해녀를 고용, 전복을 따는 어선에 편승해 실컷 즐기고 놀다 집에서 가출신고로 근처 파출소에 붙들려 귀가하기도 했다. 그와 같이 낭만의 학창시절 단꿈이 남침의 벼락으로 깨지고 나의 일생을 두고 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게 만들었다.
당시 우리 셋은 성격도 달랐지만 가정환경은 더욱 대조적이었다. 우선 이상직의 부친은 일찍이 청년운동에 몸을 바쳐 지방 방위군 장교로 반공노선 일선에서 활약, 그곳 지방의 방위군 편대장인 반면 한재은 부친은 좌익계에 몸을 담아 지하조직 운동을 하며 피신다니는 처지인 남로당원이었으며 나는 평범한 공무원 가정 출신이었다. 그래도 가정환경과는 별도로 우리는 변함없는 우정으로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대학입시를 앞두고 각자의 목표를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던 그때 인민군의 남침이 단행된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의 아우성과 그 공포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서해안 조용한 시골 친척집으로 피난을 떠났었다. 한편 이상직은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또한 한재은은 보도 연맹으로 경찰에 예비 구속된 아버지의 뒷바라지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민군이 우리고장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물러있지 않고 급히 학교로 등교했다. 당시 나는 학도 호국단 간부였고 더구나 군사학교 훈련을 받은 학훈생으로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지도했었으므로 그들이 말하는 소위 반동 1호의 죄목으로 기숙사 지하실에 끌려가 타 교생 빨갱이들에게 잔인한 집단 구타를 당하고 인민군 의용군을 지원하겠다는 서약으로 겨우 구제를 받았고 구사일생의 어려운 고비를 거쳐 그곳을 탈출, 한국군의 학도병 졸병 신세가 되었다. 한편 한재은은 그의 아버지가 보도연맹원으로 예비구속 되었다가 경찰 후퇴시 총살 당했고 그후 유가족의 혜택(?)으로 인민공화국 학생 자치단체를 구성, 북쪽정치공작원의 지시에 따라 무수한 학생들을 반동으로 처벌·처치하는 총책을 담당하며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다했다. 그랬던 그가 당당한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내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서로 말문이 막힌 우리는 껴 앉고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벌써 그가 타고나온 차를 타고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지난날의 악몽을 서로 머리 속으로 그려가며 우리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시대를 저주하듯 그와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산속에 자리잡은 곳은 어느 특수부대인양 차가 멈췄을 때는 장교숙소라는 명패만 볼 수 있었고 날이 어두운 관계로 사방을 살필 수가 없는 곳이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한재은은 웃옷을 벗어 재끼고 맑은 정신으로는 회상하기 싫은 지난날의 악몽을 되짚어가기가 차마 어려웠던지 사물함에서 소주를 꺼내어 벌떡벌떡 마셨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과자를 집어먹다 말고 문득 “그래 어떻게 살아 남았니?”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던진 물음은 살아남은 것도 이상하지만 대한민국 장교가 되었다는 것이 더욱 의아스럽기 때문이었다.

인민군관 되려다 국군 소위된 친구
“자~식” 지난날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습관된 말투.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우정의 표현이자 어차피 알게 될 것, 그 실마리가 그리도 급하냐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인민군이 진주하면서 좋은 가정성분(?) 혁명가의 아들이라는 특혜로 정치공작원으로부터 얻은 학교자치대의 총책을 담당, 반동학생들의 심사를 처리하고 많은 학생들을 차출해 의용군으로 보내는 일을 하면서 인민군의 군관이 되기 위하여 정치세뇌 교육과 지방치안대에 몸을 담아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국군의 인천상륙과 9·28서울 탈환 등으로 인민군이 우리고장을 철수할 때 친구는 짚신 세 켤레와 죽창을 지급 받고 빨치산 투쟁의 명령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라는 지령을 받았다 한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혁명과업이었다. 빨치산 투쟁이라면 차라리 죽으라는 명령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한다. 그는 명령에 그대로 복종하여 피기도 전에 비참하게 죽기는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어 산으로 올라가는 도중 몰래 탈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다음날 멀리에서 “대한민국 만세”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재빨리 뒷문으로 뛰어나와 평소 자기 아버지가 은신하던 뒷산의 동굴을 향하여 뛰어 달아났다 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멀리 내려다 보이는 집에는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군복차림의 장정들이 집을 포위하고 칼빈총 공포를 쏘면서 수색하는 광경을 보는 순간 ‘이 땅굴에서 얼마나 내가 버틸 수 있으며 지난날 아버지의 이념 때문에 갖은 고생의 인생살이를 한 나의 어머니가 또다시 자식으로 인하여 고난을 겪으셔야 할 불행한 여생’을 상상할 때 더욱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겼다 한다. 그리고 비참한 인생의 최후를 마친 아버지와 똑 같은 지경에 이르렀음을 상기할 때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도 역설하던 애국이념이 지난 3개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과연 보람된 애국정책이었던가 하는 참상에 실망과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 이념을 위하여 이 산속 토굴에서 죽음을 당한다고 생각할 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판단, 그는 동굴을 나왔다. 그리고 잡히면 맞아 죽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차라리 죽을 바에야 평소에 자식과 같이 귀여움을 받던 이상직 아버지에게 자수, 보호를 받으며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법에 의한 정당한 처형을 당하리라는 각오로 앞뒤를 살피며 어두운 뒷골목을 가까스로 더듬어 이상직의 집 뒷담 밑에 숨어있다가 용기를 내어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다 한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뒷문을 닫으려는 순간 “쿵” 소리에 기절할 것 같이 놀란 상직이 모친에게 매달리며 “어머니 살려주세요” 하고 애원할 때 덜덜 떠시는 상직이의 모친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기마저 하였다 한다.

이념보다 더 두터운 정

부엌에서 자기어머니의 비명소리에 재빨리 뛰어나온 상직은 떨고 몸을 겨누지 못하는 자기 모친과 재은이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광경은 (몇 년 후 다시 이상직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지만) 차마 볼 수 없었다 한다. 부엌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사랑방까지 들렸는지 “상직아 무슨 일이냐?”상직이는 우렁찬 아버지 목소리에 ‘이제는 도리가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공산당을 용서하지 않는 아버지, 더구나 지난 3개월간 재은이의 죄목을 잘 알고 있는 아버지인 만큼 상직이는 참으로 난처하였다 한다. “무슨 일이냐” 평소에도 무서워하는 아버지의 재차 고함소리에 “저… 재은이가 담을 넘어 왔어요” “뭐 재은이가?” 잠시 침착하게 그 무엇을 생각하던 아버지는 문을 쾅 닫으며 “못난 자식” 한 마디 뿐 어떻게 처치할지 몹시 두렵기만 하였다 한다(이상직의 후일담). 한참 후 문이 다시 열리며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냐” 대답 없이 처분만 기다리던 아들에게 “이놈아 짐승도 쫓기다 집에 들어오면 잡지 않는 법 하물며 그렇게도 친하던 너희들 우정이 겨우 그것 뿐이냐 못난 자식들…” 하고 혀를 차며 잠시 후에 “골방에 머물게 해라”하고 문을 쾅 닫으셨다. 결국 감춰주란 뜻이다. 이 말에 놀란 것은 한재은보다 이상직이었다. 사랑하는 자식의 친구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처참한 모습에 이념보다 더 두터운 정을 내세운 아버지의 인격에 감동된 이상직은 말없이 재은이를 끌고 골방에 들어갔다. 철저한 반공투사의 골방 속에 빨갱이 학생두목이 감춰졌으리라고 그 누가 생각할 수 있으랴. 그후 근 3개월간 상직이의 모친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안전하게 숨어있었다 한다.

압록강까지 진격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인민군의 남침에 의하여 다행히 한국통일이 예상보다 빨리 앞당겨지는가 하였는데 예상치 않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무모하게 진격한 유엔군은 후퇴하였고 전황은 다시 역전, 수도 서울이 또다시 공산군의 손에 들어가 1·4후퇴의 비참한 비극이 벌어졌다. 6·25남침의 공산치하 3개월에 몸서리쳤던 삶을 예상하면서 젊은이들은 방위군 편성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모두 남쪽으로 내려와 더러는 얼어죽기도 하고 굶어 병으로 죽기도 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상황에서 한 몫을 담당했던 것이 방위군이었다. 이상직의 아버지는 지방 방위군 대대를 근전하게 편성, 선두 지휘하여 질서 정연하게 남쪽으로 향하였다. 방위군 우리고장 편대장 차에 군복 차림으로 버젖이 경호를 담당한 것은 골방에 숨었던 한재은과 그의 아들 이상직이었다. 추운 겨울 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여 가는 도중 가끔 뒤를 돌아보며 “춥지들 않니?”하고 상직의 아버님이 물을 때마다 한재은은 지난날 가정을 돌볼 생각 않고 소란과 폭동을 선동하며 미 제국 괴뢰정부를 타도하여야 한다고 외치던 자신의 아버지 모습과 대조적인 삶이 비교해 지더란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방위군 교육대에서 2개월 가량의 훈련을 끝내고 간부후보생의 지원서와 신원 보증서를 써서 편대장인 이상직 아버지의 추천서를 써달라고 고개를 숙인 채 내밀었는데 “자식~” 하고 웃는 기색으로 날인하여 주시더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마음속의 울음을 참아가며 “아버님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하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울었다 한다. 그리고 무사히 간부후보생 교육을 마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된 것이다.

죄값 만회하려 최전방 자원

여기까지 이야기를 끝낸 한재은은 눈시울을 적시면서 “나 화장실 좀…” 하고 일어났다. 세수를 하였는지 얼굴에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너 타고 간 그 의용군 지원자들 중 살아 돌아온 사람 한 사람도 없다더라”하고 물었다. 그 말은 너는 어떻게 살아 남았느냐는 나의 지난날을 알고 싶은 모양이다. “너 아팠었니?” 밑도 끝도 없이 되물었던 그 말은 지난날 너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나의 말이기도 하다. 기숙사 지하실에서 까물어 치도록 구타를 당하고 거듭 또 힘겨운 고문까지 당하는 꼴을 차마 더 등한시 할 수 없었던지 한재은은 간접적으로 의용군의 지원을 권유하여 그것을 미끼로 나를 구제시켜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작별 차 재은이는 의용군 수송차를 뒷 따라가는 나를 따라오면서 처참하게 된 나에게 몸조심하라고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억지로 참았던 분노가 치밀어 있는 힘을 다하여 그의 뺨을 후려갈기고 그가 쓰러지는 꼴을 보면서 옆 골목으로 돌아가는 의용군 수송차에 재빨리 뛰어 올라탔다. 만일 이 구제마저 없었다면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나는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앞날의 많은 꿈을 앉고 앞으로 나의 인생 행로에 들어서면서 피기도 전에 시대의 덫에 걸려 마음에 없는 의용군으로 끌려가 부러진 앞날을 예측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진정 하나님의 가호가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여러 가지 고비를 수차 넘기고 결국 화약냄새 풍기는 전투복 차림의 학도병인 나. 다음날 내 가슴에 얻어 달게 된 전투 무공화랑훈장이 나의 인생의 앞날에 과연 그 무슨 득과 뜻이 있겠는가? 그리고 또다시 전투장으로 가야 하는 나의 처지에 구태여 지난날의 기구한 기적을 하나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나 다음달 최전방 전투부대로 전속 간다”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말속에는 다소나마 지난날의 과오와 구겨진 우정을 이 장교 복장으로 그리고 전투장에 나가 고생의 벌로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백 같기도 하였다. 잠이 든 척하는 나의 모습에 그도 한숨을 쉬며 돌아 누었다.
해가 바뀐 다음에 나는 치열한 전투장에서 벗어나 생명만은 지킬 수 있는 후방 행정요원으로 차출되어 전출명령과 동시에 휴가를 얻었다. 곤색 대학생 양복차림의 이상직을 만나는 나의 꼴은 처참하기도 하였지만 각자의 운명이니 어찌하겠는가.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는 이상직은 한참 만에야 “야 재은이 전사 했단다…” “뭐?” 참으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지난번 육본 앞에서 마주 쳤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상직이 몇 달 전에 받았다는 군사우편을 내 보인다.
‘시대는 나를 불효자로 만들고 친구들의 우정마저 저버리는 배신자가 되었다. 반성이라기보다 전투 지휘하는 것이 임무이니 잘 싸울 수밖에….’ 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오후에 상직이와 내가 한재은 모친을 위문차 방문하였을 때 병석에 누워계신 모친은 옛 인자하게 보이던 쌍커플 눈은 온데간데 없이 헐고 짓눌려 빨갛게 되었고 눈물마저 말랐는지 때때로 눈에 물기가 젖으면 손수건으로 눈을 닦을 때 몹시도 아픈 기색이었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너희들 왔구나” 하고 남편과 자식을 잃은 슬픈 비극을 회상하는지 멍하니 말이 없다가 “한번 다녀라도 갈 것이지…” 겨우 나온 목소리는 아직도 자식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탄식이기도 했다. 마주 보는 상직과 나는 눈시울을 붉혀가며 마주쳐다 볼 뿐이었다.

6·25 전쟁은 그때를 맞추어 태어난 우리 세대 대부분에게 이런 비극을 곳곳에 심어놓았다.

채 우 병  
상록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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