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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병자, 유럽 … 중병 앓는 영국
코리안위클리  2011/11/16, 11:50:18   
▲ 반월스트리트 시위에 동조하고 있는 런던 시위대가 지난 10월 20일 세인트폴성당 밖에서 경제 이슈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휴가 가면 책상 빠질라! 직장인 47% “휴가 안 갔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언론은 원래 좋은 소식은 그냥 마지못해 전하고 나쁜 소식을 다룰 때만 신이 난다는데, 요즘 영국 언론이 딱 그 짝이다. 정치·경제·사회면 어딜 둘러 봐도 어둡고 우울하고 암담한 뉴스만 보인다. 지구촌 전체가 너 나 할 것 없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이런 일들이 영국에만 국한된 건 아니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몇 개만 살펴 보자.
영국 실업자 규모가 최근 17년 중 최고여서 16~64세 인구의 8%가 실업자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의 긴축재정이 시행되어 공공부문에서 실업자가 막 쏟아져 나올 내년이면 이 수는 300만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거기다가 160만명을 넘어선 구직자 실업수당을 받는 인구도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가장 열심히 일해야 할 청년층 실업인구가 10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이 10명 중 1명이 실업자다.
영국 직장인의 어려움은 이제 극에 달한 분위기다. 직장인의 3분의 2가 최근 월급이 줄었거나 동결되었다고 한다. 공공부문의 직장인들이 특히 심해 4분의 3가량이 월급이 깎였다. 더군다나 직장인의 거의 반에 가까운 47%가 책정된 휴가를 모두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자신의 휴가 일수를 50%에서 많게는 75%까지나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혀 사용하지 못한 근로자도 10%에 달했다. 이는 불경기를 맞아 실직, 감원이 빈번해지면서 근로자들이 자리 비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감원 대상에 오르는 것을 피하고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휴가를 안 간 것이다. 거기다가 동결되었거나 삭감된 월급으로는 오르는 물가를 감당할 수 없어 휴가를 가기가 부담스러웠던 것도 원인이다. 통계를 보면 영국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근무시간이 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일은 안 하면서 휴가만 즐기고 걸핏하면 병가 내고 실업수당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영위되던 대처 총리 이전 시절의 ‘영국병’은 사라진 지 오래다.

밀려나는 고급 상점들

전 제품을 1000원 이하로 파는 1000원 상점이 한국에도 많이 있듯이 영국에도 1파운드(약 1800원) 상점이 근래에 많이 늘었다. 중산층이 사는 런던 근교에도 중저가 브랜드 가게들이 전통 고급 상점들을 밀어내고 들어서고 있다. 아무리 좋고 싸도 발걸음을 잘 하지 않던 영국 중산층마저 이제는 이런 중저가 브랜드 상점이나 할인 생필품 가게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런 1파운드 상점 중 가장 성공한 체인인 ‘파운드월드’는 영국 전역에 120여개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기존 가게보다 규모가 작은 취급품 1000개 정도의 편의점 스타일 분점을 동네마다 열겠다는 계획이다. 다른 모든 소매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유독 이런 저가생필품 상점들 매출만 증가하고 있다.
장사꾼은 참 별것도 다 만들어 판다. 불 난 집에 부칠 부채를 만들어 판다고나 할까? 최근 실업을 위로하는 카드까지 등장했다. 이런 카드가 있는지를 문의하는 전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8가지 종류의 실업카드를 만들어 판매를 한다니 앞으로 어떤 종류의 카드가 더 나올지 궁금해진다. 영국인만큼 카드를 많이 쓰는 사람도 없다. 성탄이나 입학, 졸업, 승진, 전근 등의 경우는 물론이고 나이와 관계에 딱 들어맞는 생일 축하카드 등 카드의 종류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이다. 그래도 실업카드의 등장을 보고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업의 아픔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용도로 본다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은 카드이긴 하지만 실제 이런 카드를 받으면 위로가 될까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카드의 문구나 디자인에서 위로를 받기보다는 자신의 실직을 주위의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위로를 해주기 위해 마음을 썼다는 사실 자체에서 위안이 될 법도 하다.

대학 나와봤자…

불경기 여파는 비참한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전국에서 구조된 유기견이 지난 한 해 동안 무려 12만마리나 된다고 한다. 최근 11년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사람보다 개를 더 사랑한다는 영국인들이 이렇게 많은 개를 내다버리는 것을 보면 정말 살기가 어렵긴 어렵나 보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영국에서 개 한 마리 키우는 비용은 먹이나 각종 예방주사, 보험료 부담 등으로 인해 거의 갓난아이 키우는 만큼의 부담이 된다.
2007년 영국 대학을 졸업한 5만여명을 조사한 결과 거의 28%가 아직까지도 풀타임 직업을 구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 약 20%는 대학학위가 취업에 크게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학위가 전혀 쓸모가 없다는 반응도 거의 7%에 이르렀다. 또 11%는 대학학위는 든 돈에 비해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더욱이 내년부터는 학생이 부담하는 학비가 3배나 오르고 실업자는 더 쏟아져 나올 전망이고 보면 대학학위의 값어치는 더욱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삶은 점점 더 척박해지고 있다. 특히 대도시의 경우 지난 20년간 집값이 많게는 다섯 배, 평균 세 배 정도 올라 미혼자는 혼자 월급만으로는 셋방도 구하기 어렵다. 신혼부부가 부모의 도움 없이 자기 집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 직장인들은 부모님 집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 추세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자녀들의 방학 기간이 아닌 학기 중에 휴가를 다녀온다는 학부모들의 수도 전체의 절반에 가깝다. 원래 학교 방학 기간과 학기 중의 여행 경비는 거의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사람들이 몰리는 휴가철에 경비가 두 배 정도 더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학기 중에 자녀를 데리고 휴가를 다녀오면 보통 학교가 부모에게 벌금 100파운드(18만원)를 부과한다. 하지만 그 금액이 휴가비 절약에 비해 턱도 없이 적고 그나마 28일 안에 내면 반을 깎아 주니 절약의 유혹을 못 이기고 학기 중 휴가를 다녀오는 가족이 증가 추세라고 한다.

경비 줄이려 학기 중 휴가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참 구차하고 비참한 얘기만 골라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가감 없는 영국의 현실이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챙겨 놓았던 국가 비상자금은 몇 차례에 걸친 은행구제금융으로 다 고갈되었다. 캐머런 총리가 실토하듯이 재정상태는 G20 국가 중 가장 나쁘다. 그렇다고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듯 영국 조야 정치인들은 참 기발한 아이디어를 꺼내 들고 국민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보수당은 캐머런 총리가 선거 전부터 꺼내 든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 정책의 수행 자금과 중소기업의 소생을 도울 ‘빅 소사이어티 은행’ 자본금으로 시중은행 휴면계좌(dormant account)에서 잠자고 있는 돈 150억파운드(약 270조원)를 빌려 쓰겠다고 한다. 부도덕한 거대은행이 맘대로 이용 못하게 주인 없는 돈을 빼서 좋은 일에 쓰면 일석이조가 아니냐는 논리다. 세계 금융의 중심 영국이 집안에 돈의 씨가 마르자 아이들 돼지 저금통까지 뒤지는 듯해서 보기가 딱하다. 캐머런 총리가 정책 집행 생각 때문에 흥분해서 아침잠을 설친다는 ‘빅 소사이어티’의 주요 골자는 시민사회가 중앙이나 지방정부가 갖고 있던 각종 권한을 이양받아 자신들의 지역문제를 심의하고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또 자원봉사자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켜 사회봉사 기구를 만들어 재정적자 축소로 인한 행정의 틈을 메우고,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사회활동 참여를 통해 서로를 보살피는 따뜻한 사회를 이루겠다고 한다. 전국 4개 도시에서 우선 이런 시도를 해보고 결과를 봐서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이에 대해 노동당은 국가는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 이제 국민이 모든 것을 각자 해결하라는 것이니 돌려서 말하지 말고 그냥 쉽게 ‘DIY(Do It Yourself) 정책’이라고 솔직하게 부르라고 조롱한다.

정당들은 너도나도 “인민의 힘”

노동당은 그에 반해서 한때 당을 흥분의 논쟁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가 정책 주창자의 극우적 발언으로 수면 아래 잠깐 내려가 있는 ‘블루 레이버(Blue Labour)’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구청 임대주택에 살면서 교수를 하던 백면서생 출신 모리스 글라스만 의원의 정책이다.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대표의 정치철학 스승(guru)이라 불리는 글라스만은 밀리밴드의 눈에 들어 졸지에 상원의원이 되었다. 블루 레이버의 주장은 좌파 학자나 정치인들이 피식 웃고 말 ‘종교·국가·가족(Faith·Flag·Family)’이 사회의 근간이 다시 되어야 하고, ‘상부·상조·단결(Reciprocity·Mutuality·Solidarity)’ 이 노동당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축구클럽, 교회, 노동조합 같은 자발적 단체구성원들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고 부드러운 보수주의(small c-conservative) 요소가 가미된 사회주의를 정책으로 삼아 1945년 이전의 노동당 뿌리로 돌아감으로써 노동자와 중산층의 지지를 다시 얻어 수권정당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주요 논지이다. 글라스만은 지난 10년간 이미 런던시민(London Citizen)이란 단체를 만들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시민운동을 해 왔다.
보수·노동 양당에서 갑자기 들고나온 정책의 공통점은 ‘인민의 힘(people power)’이다. 영국 정치인들 눈에 이제 갑자기 인민이 들어오기 시작한 모양이다. 모두들 중앙 권력의 폐해를 새로 발견한 것처럼 탓한다. 총리의 입에서 “그동안 중앙을 비롯한 지방정부는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퉁명스러웠다”라는 자책이 나오는가 하면 노동당 대표 밀리밴드 입에서도 “정부는 쌀쌀맞고, 거만하고, 관료적일 뿐”이라는 일갈이 터져나온다. 한마디로 말해 모두들 인민의 힘만이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이 양당의 기존노선과는 너무 많이 달라 모두들 상당히 헷갈려 한다는 점이다. 노동당의 정책인지, 보수당의 정책인지 구별이 확실히 안된다. 더군다나 요즘 난무하는 정치조어들을 보면 더욱 정신이 없다. 원래 블루(blue)는 보수주의 색깔이고 레드(red)는 사회주의 색깔이라는 것이 통념이다. 그런데 블루 레이버(보수주의 노동당)는 뭐고 프로그레시브 컨서버티브(Progressive Conservative·진보 보수당), 혹은 그보다 더 나간 레드 컨서버티브(사회주의 보수당)는 또 뭐냐는 것이다. 전통적 보수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정책을 노동당이 채택하자고 난리고 그에 맞서 보수당은 자신들의 지지기반 계층의 이익을 등진 채 노동당의 지지층을 탐내면서 인민의 힘을 들먹이고 있다.
자신들의 것만으로는 이것도 저것도 안되니 바야흐로 니 것 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섞고 비벼서 유권자 입맛에 맞는 퓨전 비빔밥 정책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했지만 국가는 거의 부도 지경에 이르렀고 국민들의 정치불신은 극한에 도달했다. 어찌해 볼 방법이 없게 되자 정치인들이 손을 들고 항복을 하면서 인민들에게 해결책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다.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 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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