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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치르는 영국인 관찰기 - 일상에서 행복찾는 영국인들 ③
코리안위클리  2012/05/16, 07:01:58   
▲ 영국인에게 있어 모든 것은 다 바뀔 수 있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클럽은 바뀌지 않는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팀인 맨체스터시티 서포터들.

집·펍·축구·휴가·사회활동 영국인이 사는 5가지 방법

영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답은 아주 간단하다. 집과 펍(pub)과 축구와 휴가, 그리고 사회활동으로 산다고 하면 정답이다.
먼저 집부터 얘기해 보자. 다른 나라 사람들의 집에 관해서는 말이 없는데 유독 영국인에게만 ‘영국인의 집은 그들의 성이고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다.(An Englishman’s home is his castle and each man’s home is his safest refuge.)’ 같은 말이 있다. 밖에 나가면 뭔가 편치 않은 ‘대인관계 불편증’ 환자 영국인에게 집은 치외법권의 ‘성’이고 유일한 ‘안식처이자 피난처’이다. ‘집안 퉁수’인 영국인에게 집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그래서 집에 쏟는 정성은 가히 광적이라 할 만하다. 특히 정원에 쏟는 시간과 정성은 자식에게보다 더 많다. 정원을 포함한 집 안팎과 자동차 손질로 주말을 온통 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동차는 영국인에게는 또 하나의 집이니, 결국 이들의 주말은 그대로 집에 바쳐지는 셈이다.

프라이버시 7단계 규칙

영국인에게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을 연상하라고 하면 일요일 늦잠 자고 일어나 아점(brunch)을 먹고, 자식과 함께 온 아들 부부가 부모와 보내는 삼대(三代)의 평화로운 늦은 오후를 떠올린다. 할아버지가 정성을 다해 키운 정원에 만발한 꽃들 사이를 뛰노는 손자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고 그 옆에서 할아버지는 돋보기를 쓰고 두꺼운 일요일판 신문을 읽고 있다. 문이 열린 거실에는 아들이 자기 클럽의 축구 경기를 소리 지르면서 보고 있고 부엌에는 고부(姑婦)가 같이 도란도란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행복을 보장하는 영국의 정원과 거실은 집 바깥 길에서 잘 보이지 않게 집 뒤쪽에 있다. 최대한 프라이버시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다.
프라이버시에 대해 편집광적으로 집착하는 영국인에게 프라이버시의 규칙이 없을 리 없다. 영국의 집과 관련한 개인 프라이버시에는 그 강도에 따라 7단계가 있다. 자기 집 앞길, 길과 자신의 집 사이에 있는 주차 공간, 포치(porch·돌출 현관, 현관 앞에 베란다처럼 대문을 단 공간이 있다. 신발도 벗어 놓고 우산도 놔둔다), 집안(현관문을 들어선 정말 집안), 자기 방, 자기 물건(서랍·일기장·편지), 그리고 마지막이 개인의 머릿속이다. 단계를 밟아 들어갈수록 프라이버시의 강도는 진해진다. 심지어 남편이 사용하는 서재나 자식의 방에 들어갈 때도 노크를 해야 함은 물론이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자식의 방 책상 서랍이나 우편물을 열어 보면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다. 영국인 프라이버시의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사상과 신념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영국인들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담을 겹겹이 쌓아 놓는다. 이 모든 것이 다 지켜지는 한 영국인은 안전하다고 여기고 자신은 하나의 인간이라고 믿는다. 집은 그런 모든 것의 상징이다.
1967년부터 영국 자동차 앞좌석에는 안전벨트가 반드시 장착돼야 했으나 승객 착용은 권고 사항이지 의무는 아니었다. 법적으로는 승객의 안전벨트 착용을 의무화했지만 국회에서는 논쟁을 계속했고 26년 뒤인 1983년에야 최종적으로 법제화됐다. 세계에서 거의 처음으로 벨트 장착을 의무화해 놓았지만 정작 법으로 강제화한 것은 선진국 중 가장 늦었다. ‘바퀴 달린 집(home on wheels)’인 자동차 안까지 공권력의 손길이 미쳐야 하는지에 대한 영국민들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가 테러 방지를 위해 ‘간절하게’ 원하는 ID카드(신분증) 제도도 20년 이상 도입을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지 모른다는 비판 때문이다.

동네 사랑방 ‘펍’

영국 동네 펍은 바로 동네 사랑방 겸 공회당인 마을 선술집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일 수 있는 곳이다. 모두들 퇴근해 저녁 먹고 하나둘 모여서 정다운 사람들과 한담하고 축구 보면서 논쟁도 벌이고 당구를 비롯한 각종 게임도 하고 그러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그런 곳이 영국 펍이다. 영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 즉 파티가 펍에서는 항상 열리고 있는 셈이다. 초대 받지 않아도 내가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상설 파티장’이다. 집에서 손님을 초대해 여는 파티는 주최하는 호스트나 게스트 모두 부담이 되는 일이다. 파티를 주최하는 일은 복잡하기가 그지없다. 초대하는 게스트들의 계급, 사회적 지위, 친분 관계까지 모든 사항을 고려해야 하는 등 초대 손님 명단 작성도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 나머지는 얼마나 고려할 일이 많겠는가? 게스트들도 쉽지 않다. 가지고 갈 선물, 입고 갈 옷 등 거절할 수 없는 사이로부터 받은 파티 초대는 꼭 달가운 일만은 아니다.
펍은 이런 모든 번거로운 절차가 생략된 매일 열리는 동네 파티이니 얼마나 좋은가? 가고 싶은 시간에 가서 자신의 돈으로 음료를 사 먹으니 누가 술값을 낼 건지 걱정할 일도 없다. 원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놀다가 돌아가고 싶으면 가면 된다. 그래서 펍을 빼고는 영국인의 삶을 논할 수가 없다. 펍은 영국인에게 있어 그냥 술집이 아니다. 일과 집 사이에 있는 제3의 장소다.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긴장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는 긴장이 없는 그냥 즐거움만 있다. 굳이 약속을 해야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언제든지 가면 정겨운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곳이고, 외로움을 느낄 때 펍에 가면 대화할 수 있는 같은 처지의 상대가 반드시 있다. 펍이 있어 영국인은 외롭지 않고, 그래서 펍은 영국인에게 있어 집과 마찬가지로 휴식을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다.

영국인은 축구로 산다

영국인 하면 축구를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영국인이라고 모두 축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골프, 럭비를 좋아하는 사람, 크리켓에 미처 여름이면 동네 공원 경기장에서 2~3일을 꼼짝하지 않고 보는 사람도 있다. (크리켓은 한 시합이 2~3일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EPL)로 대표되는 영국 축구가 영국인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 훨씬 크다. 대표적인 국민운동이라 할 만하다.
영국인에게 있어 모든 것은 다 바뀔 수 있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클럽은 바뀌지 않는다. 자신의 고향 클럽이든 아버지의 클럽이든 어릴 때 한 번 자신이 정한 축구클럽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이혼을 밥 먹듯이 하는 영국에서 새아버지를 따라 성을 바꾸어도 신기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새로 성을 만들어 바꾸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응원하는 축구 클럽은 바꾸지 않는다. 자기 팀이 형편없어져 3부 리그로 가도 그 팀을 따라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가서 추운 겨울날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응원한다. 축구 팬클럽은 그들의 삶이자 인생이다. 끼리끼리 모여서 축구를 얘기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심지어는 같은 클럽 팬들이 가는 펍에만 출입한다. 그 펍에서 대화에 끼려면 클럽 소속 선수들의 과거 기록은 물론 그들의 이적 역사, 가족사뿐만 아니라 사생활까지 훤해야 한다. 축구 이야기는 영국인과 사귀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같은 축구 클럽 팬이라면 바로 친구가 된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축구 얘기를 같이하면 아주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대개의 축구 팬들은 연중 입장권을 사서 시합뿐만 아니라 클럽의 모든 행사에도 빠지지 않는다. 대중매체의 축구 관련 뉴스뿐만 아니라 클럽 웹사이트는 매일 필독 사항이다. 축구는 영국인 개인의 정체성이라고까지 표현된다. 축구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영국인 중에서 엘리자베스 여왕만 빼고는 응원하는 클럽이 없는 영국인은 없다. 응원하는 축구 클럽이 없는 영국인은 “혼이 없다”는 말까지 듣는다. 과거에는 축구는 서민 운동이었고 중산층 운동은 크리켓이나 럭비, 혹은 골프였는데 이제는 아니다. 축구는 모든 계급을 망라한 영국인의 관심 사항이다. 영국인 사이에서 인종·종교·성별에 아무런 문제없이 유일하게 논쟁을 할 수 있는 아주 안전한 주제가 축구다. ‘저녁 밥상에서 종교와 정치 문제는 금기 사항이다(Never discuss politics and religion at the dinner table)’라고 영국인들은 말한다. 그러나 10대 자녀와 대화가 잘 안 되는 아버지도 축구 이야기로 대화를 푼다. 영국 드라마를 보면 부자 간의 애정은 어릴 때부터 함께 축구장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렇듯 영국인은 축구로 산다.

다음 휴가 준비를 위해 산다

이제 영국인의 휴가를 말해보자. 영국인, 특히 서민의 삶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바로 휴가다. 서구 유럽인들 모두 다 그렇긴 하지만 영국인도 휴가에 거의 목을 맨다. 휴가는 한 달 만의 즐거움이 아니다. 준비하는 즐거움과 다녀와서의 즐거움도 이들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휴가를 다녀오면 가족이 모여 휴가 사진을 정리하면서 다시 즐긴다. 동시에 다음 휴가 준비로 바로 들어간다. 각자 다음 휴가를 가고 싶은 곳을 조사하고 생각한다. 그런 다음 온 가족이 조용하게 모이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해 다음해 휴가지를 결정하고 신년 휴가가 끝나자마자 바로 예약에 들어간다.
연말연시 기간 TV를 비롯한 영국 언론매체는 휴가 광고로 도배된다. 휴가 예약을 하고 나면 온 가족이 분담해서 나머지 준비를 한다. 아버지는 휴가지 및 자동차 등의 각종 예약을 한 후 비자 문제나 예방접종 같은 조사를 한다. 어머니는 휴가 기간 식단을 짜고 그곳 특산 재료를 사용한 요리 등을 공부한다. 또 필요한 식기나 준비물을 미리미리 챙기고 어디 가다가 싼 물건이 있으면 산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휴가지의 명승지나 지리, 역사 같은 것을 공부 겸 사전에 조사하고 그 나라 언어도 공부한다. 이렇게 온 가족이 휴가를 준비하면서 그 시간을 기다리고 가고 오고 하는 즐거움이 영국인에게는 단조로운 일상을 불평 없이 견디게 하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시골 마을의 사회활동

영국인은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거나 일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삶을 바쁘고 즐겁게 한다. 정당에 속하거나 각종 클럽에 가입하거나 자선을 비롯한 각종 행사를 기획해 거기에 몰두하며 바쁘게 일을 한다. 거기서 즐거움을 찾고 기쁘게 살아간다. 모든 활동이 개인의 이득과는 거리가 먼 일들이다. 이른바 ‘내가 모르는 타인을 위한 고상하고 고귀한(noble and respectable) 일’들과 관련이 있다.
영국에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큰 도시 못지않게 다양한 문화행사가 있고 클럽 활동이 있고 축제가 있다. 자칫 무료해지고 단조로워질 시골 생활을 이런 일을 만들어냄으로써 즐겁게 만든다. 정기적으로 무도회도 개최하고 주위 마을들이 모여 지방 음악회도 개최한다. 동네 사람들로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을 만들어 때때로 공회당에서 연주도 한다. 수십 명에 불과한 이웃들 앞에서 자신들이 무슨 유명 관현악단원인 것처럼 엄숙하고 진지하게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한다. 이런 동네 행사를 대하는 영국인의 태도가 하도 진지하고 심각해서 저것이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저러는지 하는 쓴웃음이 다 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즐거움임을 알고 나면 그 심각한 태도들로 인해 오히려 마음이 숙연해진다.
지난 여름 필자는 고워음악축제(Gower Music Festival)에 초대를 받아 왕복 9시간의 운전을 하고 다녀온 적이 있다. 한국 클래식계의 떠오르는 신성인 피아니스트 김선욱군과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양 초청 연주회였다. 웨일스 해변 고워반도 구석의 작은 마을들이 모여서 만든 음악축제다. 인근 마을 14개의 역사가 그냥 묻어날 듯한 아주 작은 교회를 연주장으로 삼아 마을 주민들이 음악을 감상하는 귀한 기회였다. 두 한국 젊은이의 연주회가 열린 마을은 해안가 황무지 중간에 위치한 겨우 가구 수 30호에 불과한 조그만 곳이었다. 200여년 전에 지어진, 보조의자를 빈틈 없이 놓아도 50석이 채 안 되는 마을 교회에서 열렸지만 정말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콘서트였다. 마침 석양이 서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와 연주장은 정말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그 교회 안을 꽉 메운 아름다운 우리 젊은이들의 황홀한 연주는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청중은 모두 정장을 갖춰 입은 머리가 하얀 영국 시골 노인들이었다. 연주 감상 태도나 콘서트 후 대화를 들어보면 보통 수준의 청중이 아니었다. 벌써 이 음악축제는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동안의 초청 연주자를 보면 상당한 수준의 음악제였다.
이렇게 아주 작은 시골 마을 주민들이 무보수 자원봉사로 음악제를 같이 준비하고 개최하고 참여하는 즐거움을 통해 외로움도 잊고 서로 어울리는 기회를 만들면서 삶을 기름지게 하며 살아가고 있다. 거기다가 음악회를 통해 들어온 수입으로 기부도 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삶을 즐길 방법을 제대로 찾은 셈이다. 영국인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찾고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 인생의 의미를 터득한 도인들같이 살아간다.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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