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의 유적이 묻힌 곳만 텔이라 부른다지만
자신의 혼 묻어둔 고향의 언덕을
누구라도 텔이라 부르기가 부끄럽지 않으리
육신은 비록 이방 땅에 묻혀도
고향 땅 그리워하는 마음 시들지 않았구나
고달픈 인생길에 흐르는 눈물
이방 땅 강가에서 소리 없이 흘려 보내더니
하늘의 구름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돌다가
그리운 고향 땅에 비가 되어 내리련다
눈물에 젖은 숱한 이야기들이
땅 속에 켜켜이 쌓여
고향 땅 봄 언덕에 새싹을 움 티울 때
우리의 애닮은 사랑 이야기들을 들꽃으로 피우리(이스라엘을 다녀와 텔아비브가 된 이야기를 듣고 감동으로 쓴 시)
이스라엘에서 고대의 유적지가 여러 차례 묻혀서 높은 언덕이 된 곳을 텔Tel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도시가 있었던 지역은 비교적 살기 좋은 곳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성곽이나 도시를 건설하여 살다가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모든 것들이 초토화되면 또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묻혀진 도시 위에 도시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러한 역사를 반복하면서 여러 개의 문화층들이 쌓인 지역을 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옛날의 유적지가 없는 곳인데도 텔-아비브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 이유는 1800년대 말에 있었던 드레프스 사건 때문이다.
드레프스라는 유대 장군이 체포되어 독일에 정보를 주는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다. 당시 독일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프랑스는 드레프스가 독일에 정보를 주었다 하여 그를 스파이로 몬 것이었다.
그때 헤르젤이라는 파리의 한 신문 기자가 이 사건의 보도 내용이 아주 이상해 진상을 알아보니 그는 진범이 아니었고 다만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누명을 쓰고 스파이로 몰렸음을 알게 됐다.
결국 법정투쟁을 통해 다른 프랑스인이 진범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6년간 형을 살아야 했다.
헤르젤은 신문에 사설을 소설로 쓰면서 시온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1800년 말에 열린 시온주의 총회에서 그는 초대 회장이 된다.(당시 이스라엘 땅은 터키가 지배하다가 1919년 이후 영국이 신탁통치를 하게 되었다.)
시온주의 운동이 전개되자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거쳐 욥바로 몰려 들어와 정착하려는 새 땅의 이름을 붙이려고 고민하다가 헤르젤이 쓴 소설 ‘알츠 운트 노이’(old and new)-오래된 유대인이 이 땅에 새 도시를 건설한다는 뜻-의 내용에서 영감을 받아 텔아비브(old= Tel, new=Spring로 적용하게 되어 고대 유적지를 의미하는 Tel이 아니라 헤르젤을 기념하기 위해 Tel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영혼에 고향의 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상 텔아비브는 기원전 586-538년 바빌로니아 시대의 유대인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였는데 바로 옆 가나안의 항구도시인 욥바와 합해 지금은 “텔아비브 욥바”로 불리우고 있으며 현대적이고 진보적이며 전통에 구애 받지 않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가장 번화하고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 도시이다.
런던영광교회 안병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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