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크고 작은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따뜻하고 아담했던 마가렛 레일리의 서재겸 다인닝룸에서 몇몇의 사람들과 서로의 믿음을 나누기 위해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로 거의 매주 전통적 한국 목사와 합리적 영국 집사가 참 배움 느린 학생과 친절한 영어 교사로서 만남이 이어졌고 마침내 사랑 가득하지만 냉철한 통찰력의 어머니와 자기 의견 절대 꺾지 않는 주관 뚜렷한 아들의 관계로 정립되었습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렀고 깊어지는 사랑과 지혜와는 다르게 마가렛의 육신은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아픈 마가렛을 병원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가족 이외에는 의사를 만날 수 없었기에 저는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사코 우겨서(?) 저도 함께 의사를 만나게 되었을 때 영국인 의사에게 저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의사는 영국인 할머니와 동양인 중년 아들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죠.
더욱 웃픈 사실은 의사가 마가렛에게 병환에 대해 영어로 설명하면 그녀는 제가 이해하지 못했을까봐 다시 천천히 제게 영어(!)로 풀어서 말해줍니다. 의사는 이런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요.
진료를 마치고 함께 병원문을 막 나서려할 때 마가렛은 발걸음을 멈추고 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녀는 “문앞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아름답구나. 이 햇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입구 옆으로 비켜서서 이토록 찬란한 햇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지만 기도 드리는 그 순간, 우리에게 시간은 멈췄고 영원을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를 덮었습니다.
2022년, 겨울, 새벽 2시.
투병중이셨던 마가렛에게서 기도를 부탁하는 긴급한 문자가 왔습니다.
중보하는 제 마음이 몹시도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마가렛의 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혼수상태의 마가렛은 평온한 잠을 자고 있는 듯 보여요. 그녀에게 그동안 목사님이 보내주셨던 기도를 읽어드리고 있어요’
그리고 며칠 뒤, 마가렛이 하나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함께 했던 시간과 수 많은 대화를 통해 나는 그녀의 그 담대한 믿음을 잘 압니다. 죽음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다가오는 죽음 앞에 당당했고, 죽음조차도 사랑할 수 있었기에 하나님 품안에서 참 평안을 누릴겁니다.
그렇습니다!
마가렛은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은 또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 밤,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영국과 나를 이어주던 굵은 줄 하나가 끊어져 버린 듯 휘청이는 내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 자기 의견 절대 꺾지 않던 그 배움 느렸던 소신쟁이 아들은 누구와 함께 가던 길을 멈추고 이 햇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까요?
조성영 목사
글로리아 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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