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겠느냐”.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18일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면서 남긴 말이다. 그는 또한 ‘비자금 150억원’이라는 ‘퍼즐’을 남겨놓고 떠났다.
송두환 대북송금 특별검사팀은 아직 이 퍼즐을 다 맞추지 못했다. 지난 20일 특검팀이 청와대에 보낸 2차 수사기한 연장승인요청서엔 이 문제가 첫 번째로 언급됐다. 특검팀은 요청서에서 “박씨를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구속하고 이 사건의 공소유지를 위해 자금추적 등 조사를 진행시키고 있어… 1차 수사기한(6월25일) 내에는 도저히 이를 완수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회담경비도, 총선자금도
아니라면…
150억원 비자금은 대북송금 사건의 큰 전환점이 됐다. 이를 계기로 수사기한 연장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쪽의 명분이 커진 게 사실이다. 또한 일부에서 대북송금 사건의 성격을 ‘비리사건’으로까지 몰아세우는 빌미가 됐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3일 수사기한 연장을 거부함으로써 이제 ‘퍼즐’은 검찰 또는 제2의 특검이 맞출 수밖에 없게 됐다.
이 돈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박씨의 구속영장에는 이에 대한 단서가 숨어 있다.
특검팀은 구속영장에서 “박씨가 2000년 4월 중순 일자 불상 오후 9시30분경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 22층 토파즈 주점에서 정몽헌씨의 지시를 받은 이익치씨한테서 양도성예금증서(CD) 1억원짜리 150장으로 150억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 “박씨가 2000년 4월 초순 같은 호텔에서 김영완(50·해외체류)씨를 통해 정몽헌씨에게 남북정상회담 준비 비용 명목으로 150억원을 지원해주도록 요구했다”고 덧붙였다.
영장에 따르면 150억원은 정상회담 준비 비용으로 쓰였어야 맞다. 그러나 박씨는 2000년 3월8일~4월8일 모두 4차례에 걸쳐 정상회담 예비접촉을 마쳤고, 같은달 10일 북쪽과 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했다. 따라서 박씨가 준비 비용으로 돈을 요구했다면 이미 들어간 비용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예비접촉 과정에서 국정원과 현대가 모든 경비를 지출한 마당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왜 현대에 지불된 경비의 ‘보전’을 요구했는지 의문이 따른다. 또 단순한 경비로만 보기에는 액수가 너무 크다.
따라서 돈이 명목상 정상회담 준비 비용으로 흘러나왔지만, 실제 회담 경비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씨가 돈을 건네받은 뒤 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에 찔러줬다는 설도 있으나, 이런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정치권에 유입됐다는 의혹이 튀어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벌써부터 “총선자금용이다, 민주당 구주류와 신주류에도 돈이 흘러들어갔다”는 등의 설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100억원 상당의 양도성 예금증서가 현금화된 시점은 4·13 총선이 끝난 뒤인 2000년 5월과 7월이었다. 돈세탁 시점이 돈이 필요한 때를 지나쳐버리는 꼴이 된다. 총선용 정치자금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대목이다. 당시 박씨가 문화관광부 장관이라는 점도 개운치 않다. 김종훈 특검보는 “시기적으로나 당시 박씨의 지위로 볼 때 정치자금일 가능성은 낮다”고 정리했다.
여기서 박씨가 아무리 권력 실세이지만 현대가 박씨 한 개인을 보고 150억원이라는 거액을 흔쾌히 줬는지는 여전히 풀어야 할 의문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현대가 박씨의 ‘윗선’을 보고 돈을 건넬 가능성은 어떨까?
대검의 한 부장검사는 “한 사람한테 간 뇌물치고는 돈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도 비슷한 의견을 보였다. 그는 “돈이 총선 전에 건너갔다면 그것은 박씨한테 주는 것이 아니고, DJ한테 주는 돈일 수 있다. 박씨한테 주는 돈이라면 최대 10억원 정도라면 이해가 되겠지만… 아무리 정권 실세라고 해도 그렇게 거액을 주지는 않는다”고 말해 정치자금설을 뒷받침했다.
특검팀 “정치자금엔 관심 없다”
그러나 그는 “정몽헌이 그 정도 액수면 본인이 직접 줬지, 왜 하필이면 아버지(고 정주영)의 가신이고 이미 ‘못 믿을 사람’으로 낙인 찍힌 이익치한테 박씨에게 주라고 했겠나”라며 이씨의 ‘배달사고’ 가능성도 동시에 제기했다.
이렇듯 150억원의 용처에 대한 의혹이나 설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 돈에 대한 자금추적을 벌이고 있는 특검은 정작 정치적 파장 때문인지 정치자금엔 도통 관심이 없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김종훈 특검보는 150억원과 관련해 “우리 수사범위가 아니다. 관심이 없고 호기심도 그렇게 많지 않다”면서도 “다만, 공소유지 차원에서 그 사람(박씨) 주변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아내려는 것”이라며 돈의 용처 추적에 대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특검팀은 이씨의 진술 이외에 박씨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뚜렷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오히려 거꾸로 돈의 용처를 좇아 박씨와 관련돼 있는지를 연결시켜보려는 처지인 것으로 보인다.
특검팀이 수사기한 연장을 요청하면서까지 150억원의 자금추적에 집착했던 까닭도 이 때문이 아닐까? 더군다나 박씨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는 상황에서 이씨의 진술에만 순전히 의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박씨가 변호인을 통해 이씨를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고소한 점도 특검팀의 부담이다.
박씨가 정말로 돈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또한 돈을 받은 게 ‘실체적 진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특검이나 검찰에서 이런 사실을 밝히지 못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이와 관련해 김종훈 특검보는 “자금추적 과정에서 현재(22일)까지 박씨나 그 주변으로 흘러들어간 단서를 확보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박지원씨 유죄 입증 쉽지 않아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할 경우 공판 과정에서 박씨의 유죄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박씨가 양도성 예금증서를 받자마자 김영완씨한테 건넨 뒤 이를 현금으로 할인해 썼다면 150억원의 행방은 더욱 미궁으로 빠질 수 있다. 이럴 경우 양도성 예금증서에 대한 자금추적을 하더라도 박씨가 돈을 어떻게 썼는지를 밝히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김씨와 더불어 자금세탁 과정에 깊숙히 개입한 인물인 임아무개씨가 나라 밖으로 튀고, 장아무개씨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자금추적 과정이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혐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박씨가 입을 열 까닭도 만무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수사기한 연장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70일(1차 수사기한)’의 시간제한으로 150억원 비자금 퍼즐게임을 다 풀지 못한 특검팀은 사건을 검찰 또는 다른 특검으로 넘기게 됐다. 퍼즐을 검찰 또는 다른 특검이 맞출 수 있을지, 맞춘다면 정치자금의 모양새를 띨지, 아니면 순전히 뇌물일지, 그것도 아니면 배달사고라는 엉뚱한 그림이 나올지는 지켜볼 일이다.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