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에서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있는 정모(40)씨에게는 남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는 2002년부터 3년째 신용불량자이다. 연수원을 졸업한 2000년, 동료 2명과 함께 1억원을 빌려 개업한 그의 사무실에 고객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돈을 꿔서 이자를 갚아 나가기 시작하자 빚은 7억원으로 훌쩍 뛰었다. 동료들은 다른 변호사 사무실로 떠났다. 파산 신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변호사 자격증을 잃게 된다. 그는 요즘 변호사 신분을 힘겹게 유지하고 있다.
50대 변호사 A씨가 일하는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 최근 한 식당 주인이 찾아와 “밀린 밥값을 달라”고 윽박질렀다. A씨는 건물 임대료는 고사하고 점심값마저 단골 식당에 외상을 달아두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A씨가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변호사도 좋은 시절이 다 갔나 보다”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K(34)씨는 지난해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10개월 동안 고군분투했으나 그는 2억원의 빚을 지고 올해 초 사무실을 닫았다. 법무법인에 고용 변호사로 들어간 K씨는 월급을 고스란히 빚 갚는 데 쓴다고 했다. 전주에서 10년간 일하던 J변호사(58)도 작년에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한 법무법인의 고용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 3월엔 광주지법 부장판사 출신인 60대 변호사가 파산을 했다. 이 변호사는 기업을 경영하다 빚을 지긴 했지만 현직 변호사의 첫 파산선고를 접하는 법조계의 충격은 컸다.
지난 1월 천기흥 신임 대한변협 회장은 “사법 연수원 30기(1999년 입소) 이후 변호사들의 80% 이상이 1억원에 가까운 빚에 허덕이고 있다”고 말했다. 법조 시장에 새롭게 진입하는 신참 변호사들이 그만큼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파산 전문 김관기 변호사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개업한 젊은 변호사 가운데 생활이 어려워 파산을 고려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고 말했다. 양소영 변호사는 “다들 쉬쉬 하지만 건물 임대료를 내지 못해서 건물주에게 쫓겨 나거나 인건비 때문에 직원을 두지 못하는 변호사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99년에 3884명이던 변호사는 2002년에는 5073명으로 껑충 뛰었고, 올해는 7000명을 넘어서게 됐다. 변호사 1인당 연간 사건 수임 건수는 IMF 때이던 1997년에 57.2건이었으나 올해 8월 말에는 59.4%인 34건으로 감소했다. 대한변협의 하창우 공보이사는 “변호사는 늘어나지만 오히려 변호사 사무실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면서 “임대료를 내기 힘든 변호사들이 모여서 사무실을 함께 쓰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변호사 시장이 불안해지자, 연수원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지난해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사시에 합격한 최모(29)씨는 1년간 휴학을 했다. 최씨는 “연수원에서 나쁜 성적을 받으면 취업이 어렵다고 들었기 때문에 예습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현직 변호사는 “그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변호사 불패 신화’가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는 것 같다”며 “이것이 법조계 구조 변화의 서막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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